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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배제된 당사자”우크라이나의 운명: 미국·러 협상 그 이면
    사건과 이슈 2025. 2. 19. 19:10

    미국 트럼프 대통령의 취임이후 전쟁 종식을 위한 움직임은 우크라이나를 배제한 채 미국과 러시아가 평화협상을 진행하고 있다는 관측이 제기된다. 이러한 정황은 마치 베트남 전쟁 막바지에 미국이 남베트남 정부의 입장을 충분히 반영하지 않은 채 협상 테이블에 나섰던 모습과 유사하다고 평가된다. 이른바 “월남 패망 전 미국의 움직임”과 상당 부분 닮아 보이는 이 협상 행보는, 국제정치 무대에서 이해관계가 복잡하게 얽혀 있을 때 한 당사자가 소외될 수 있다는 냉혹한 현실을 다시금 보여준다. 

    베트남 전쟁과 유사한 우크라이나의 현재

     

    우크라이나 분쟁과 장기전

    분쟁의 발단과 배경

    우크라이나 분쟁의 시발점은 2014년 유로마이단 혁명과 크림 반도 병합 사건이다. 당시 우크라이나 내부에서 친유럽 세력과 친러시아 세력 간 갈등이 첨예해졌고, 민족주의 정서와 지정학적 이해관계가 겹치면서 복잡한 상황이 전개됐다. 러시아는 크림 반도가 역사적·문화적으로 러시아와 밀접하다고 주장하며 주민투표 형식을 통해 병합을 단행했고, 우크라이나 정부와 서방 국가들은 이를 국제법 위반으로 간주했다.

     

    이 사건을 계기로 동부 돈바스 지역에서도 친러 분리주의 움직임이 본격화했다. 그 결과 2014년부터 우크라이나 정부군과 친러 분리주의 세력이 충돌을 이어갔고, 민스크 협정을 통해 잠시 휴전이 이뤄졌지만 근본적 갈등 해결에는 실패했다. 2022년 러시아의 전면적 군사행동은 이 불안한 정세에 기름을 부었다. 우크라이나는 독립 후 오랫동안 러시아와 밀접한 경제·정치 관계를 유지해왔지만, 서방 쪽으로 기울면서 러시아의 안보 우려를 자극했다.

     

    나토(NATO) 가입 가능성은 러시아가 결코 용납하기 어려운 사안이었다. 이러한 일련의 사건들은 단순히 한 국가의 내부 갈등 문제가 아니라, 미국을 비롯한 서방과 러시아의 세력권 다툼으로 확장됐다. 그 결과 우크라이나는 새로운 냉전의 충돌 지대가 돼 장기전을 겪게 된다.

     

    서방의 적극적 개입 배경

    우크라이나 사태에 대해 미국과 유럽연합(EU)은 러시아에 맞서 강경 대응 기조를 유지했다. 이는 우크라이나가 지정학적으로 매우 중요한 완충 지대이기 때문이다. 역사적으로 유럽과 러시아 사이에 놓인 우크라이나는 동·서 양측이 서로에게 영향력을 확대하려는 전략적 요충지로 여겨진다. 여기에 민주주의와 인권 보호라는 명분 역시 제시됐다. 서방은 우크라이나를 서구 체제로 편입시키는 과정에서, 러시아의 팽창을 억제하고 동유럽 국가들의 안보 불안을 해소한다는 목표를 내세웠다.

     

    실제로 미국과 유럽 각국은 경제제재, 군수 지원, 정보 공유 등을 통해 우크라이나에 힘을 실어주었다. 이는 과거 냉전 시기에 미국이 전 세계 각 지역 분쟁에서 자국에 우호적인 세력을 지원했던 방식을 연상케 한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러시아는 자국의 안보 이익이 침해받고 있다고 주장한다. 크림반도 병합과 동부 지역 지원은 러시아 입장에서 안보 완충 지대를 확보하기 위한 필사적 조치였다는 것이다. 따라서 서방의 군사 지원과 제재가 거세질수록 러시아의 반발도 거칠어졌고, 결국 우크라이나 분쟁은 누구도 쉽게 양보할 수 없는 소모전으로 고착화됐다. 이는 곧 국지전 이상의 세계적 파장으로 번지고 있다.

     

    러시아의 전략적 계산

    푸틴 대통령과 러시아 지도부가 우크라이나 분쟁에서 보여주는 일련의 행보는 매우 계산된 전략적 선택이라고 볼 수 있다. 러시아는 소련 붕괴 이후 급격하게 서방화되던 동유럽 국가들이 NATO와 EU에 가입하면서 자국의 안전지대가 줄어든다고 여겨왔다. 더불어 국경 지역에 서방의 군사 인프라가 구축되는 상황은 러시아 안보 교리상 절대 용납할 수 없다는 입장이다. 또한 역사적으로 러시아는 크림 반도를 포함해 흑해 연안 지역을 ‘대외 팽창을 위한 출구’로 삼아왔다.

     

    흑해 함대의 전략적 가치, 그리고 돈바스 지역의 자원과 산업 기반은 러시아에 직접적인 경제·군사 자산이 된다. 만약 우크라이나가 본격적으로 서방 체제에 편입되면, 러시아는 흑해 접근 권한과 동부 지역의 친러 세력 기반을 상실할 우려가 크다. 그래서 러시아는 국제사회의 비판과 경제제재를 감수하면서도 우크라이나 내 영향력 유지를 고집한다.

     

    이는 어느 정도 국내 여론을 통제할 수 있는 러시아 체제 특성과도 관련된다. 국내적으로는 서방과의 대립 구도가 ‘애국심 결집’을 유도하며, 러시아가 여전히 강대국이라는 이미지를 유지하게 해주기 때문이다. 요컨대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전략은 지정학적 이익과 국내 정치적 고려가 결합된 복합적 성격을 띤다.

     

    협상의 표면과 이면

    우크라이나 분쟁을 종식하기 위한 다양한 협상 시도가 있었지만, 표면적 합의가 이뤄져도 실제 이행되기 어려운 이면이 존재한다. 대표적으로 2014년과 2015년에 체결된 민스크 협정은 동부 지역 충돌을 완화하기 위한 핵심 틀이었으나, 양측의 신뢰 부족과 해석 차이로 결국 실패했다. 그 뒤에도 유럽 각국과 미국이 중재를 시도했지만, 러시아의 군사적 요구와 우크라이나의 주권·영토 보전 요구가 충돌하며 접점을 찾지 못했다.

    2016년 러시아에서 열린 존케리 국무장관과 세르게이 라브로프 외무장관 회담 당시

     

    여기에 미국과 러시아가 자국 이익을 우선시하는 외교 전략을 펼치면서, 당사자인 우크라이나가 배제되는 형태의 협상 가능성도 제기된다. ‘신냉전’ 구도에서 미국과 러시아가 상호 이익을 교환하는 과정에서 우크라이나의 입장이 충분히 반영되지 않을 수 있다. 이는 역사적으로 약소국이 강대국의 이해관계에 밀려 소외되었던 사례와 맥을 같이한다. 베트남 전쟁 막바지 남베트남 정부가 사실상 협상 과정에서 소외됐던 전례가 대표적이다. 결국 협상의 표면적 구조는 ‘우크라이나 분쟁 해결’을 내세우지만, 이면에서는 미·러 간 군비 경쟁과 지지 세력 확보라는 보다 광범위한 전략적 이익이 오가고 있다. 이러한 불균형은 협상의 실질적 성공을 어렵게 만든다.

     

    월남 패망 전 미국 외교와의 유사성

    베트남 파리평화협정 전개

    베트남 전쟁은 냉전 시대 가장 대표적인 Proxy War 가운데 하나였다. 베트남이 북베트남(공산 진영)과 남베트남(자본주의 진영)으로 나뉘어 치열하게 대립했을 때, 미국은 남베트남을 전폭적으로 지원했다. 그러나 전쟁이 길어지고 사상자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자 미국 내 반전 여론이 커졌다. 닉슨 행정부는 ‘베트남화를 통한 미군 철수’를 표방하며, 전쟁 비용과 정치적 부담을 줄이려 했다. 1973년 파리평화협정이 체결되었는데, 여기서 미국은 전쟁 종식을 명분 삼아 북베트남과 협상을 시도했다.

     

    문제는 이 협정 과정에서 남베트남 정부가 충분한 지위를 확보하지 못했다는 점이다. 미국은 자국 군대가 철수하는 대가로 미군 포로 송환이나 일정한 체면치레 조항을 북베트남으로부터 얻어냈으나, 남베트남 정부의 안전과 체제 보장에 대해서는 분명한 합의를 끌어내지 못했다. 북베트남 역시 전쟁 승리를 확신하는 입장이었기에, 형식적 합의 뒤 곧 군사 행동을 재개했다. 이로 인해 1975년 사이공 함락이라는 결말이 닥쳤고, 남베트남 정권은 사실상 미국에게 버려진 것과 다름없는 상황을 맞았다. 강대국이 자국 이익을 먼저 계산하고, 약소 동맹국의 입장이 뒤로 밀려나는 전형적인 패턴을 보여준다.

     

    남베트남 정부의 배제와 혼란

    파리평화협정 당시 남베트남 정부는 국가 생존이 달린 협상이니만큼 강경하게 대처하려 했으나, 미국 내부 기류가 이미 ‘철수와 전쟁 종식’ 쪽으로 급선회해 있었다. 주사위는 던져진 셈이었다. 남베트남 대통령 응우옌반티우는 협정에 반대 의사를 표명하기도 했지만, 미국의 압박 속에서 별다른 선택권이 없었다. 미국은 포로 송환과 미군 철수를 가장 중요하게 여겼고, 국내 여론을 달래기 위한 ‘평화협정 체결’ 자체를 최대 성과로 포장하려 했다. 이 과정에서 남베트남 정부가 요구했던 안전보장 조치, 후속 군사 지원, 북베트남군 철수 등은 협정문에 명확히 반영되지 못했다.

    남베트남군에 의해 석방된 북베트남군(PAVN) 전쟁 포로들이 탁한강 북쪽 강변에 상륙하는 장면

    이후 남베트남은 북베트남군의 공세가 재개되자, 제대로 된 지원을 받지 못한 채 속수무책으로 무너졌다. 사실상 미국은 협정 체결과 함께 전쟁에서 손을 떼는 모습을 보였고, 이로 인해 베트남화(越南化) 전략은 남베트남의 붕괴라는 결말로 이어졌다. 이는 국제정치에서 강대국이 자국 희생을 줄이는 방향으로 정책 전환을 할 경우, 동맹국이 쉽게 소모품처럼 여겨질 수 있음을 여실히 보여준 사례다. 오늘날 우크라이나도 만일 미국이나 서방의 지원이 급격히 줄어든다면, 비슷한 위기에 처할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국제사회 시선과 미군 철수

    베트남 전쟁 말기, 국제사회는 미국의 행동을 매우 복합적으로 바라봤다. 한편에서는 인도차이나 지역에서 발생한 민간인 희생과 전쟁의 참상을 미국 책임론으로 지적했고, 다른 한편에서는 냉전 구도 하에서 이미 장기화된 분쟁을 마무리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컸다. 미국은 국내 반전 여론과 경제적 부담을 고려해 ‘명예로운 철수’를 내세웠고, 이를 위해 북베트남과의 정치적 타협까지 감수했다. 이때 남베트남 정부의 의견이 존중되지 않은 이유는, 미국 입장에서는 협상에서 가장 중요한 상대가 북베트남이었기 때문이다.

     

    남베트남이 배제된 평화협정이 체결되자, 국제사회도 이를 ‘냉전 시기의 어쩔 수 없는 합의’ 정도로 치부했다. 냉전이라는 거대 이념 대립 속에서 한 국가의 미래보다 양 강대국 간 충돌 회피가 우선순위가 된 셈이다. 미군 철수 후 남베트남이 붕괴했을 때, 국제사회는 일시적인 우려와 비판을 표명했지만, 이미 미국은 대외적으로 전쟁을 종결했다는 정당성을 확보한 상황이었다. 이와 비슷하게 오늘날 우크라이나 사태에서도, 만약 미국과 러시아가 별도의 ‘빅딜’을 통해 긴장을 완화하는 방안을 모색한다면, 정작 분쟁의 당사자인 우크라이나가 소외될 가능성을 완전히 배제할 수 없다는 분석이 제기된다.

     

    “월남 패망”이 주는 교훈

    남베트남 정권이 1975년 패망하는 모습을 지켜본 많은 전문가와 정치인들은, 강대국 간 갈등 속에서 약소국이 어떤 식으로 희생되는지를 생생하게 인지하게 됐다. 미국은 전 세계를 무대로 한 냉전 경쟁에서 더 이상 베트남 전쟁에 매몰될 이유가 없다고 판단했고, 그러한 전략적 판단에 따라 남베트남을 일종의 ‘협상 카드’로 사용한 셈이었다.

    베트콩에 의해 살해된 남편의 시신 앞에서 오열하는 베트남 여성

    이는 결국 베트남 전쟁이 단순한 이념 전쟁이 아니라, 미국의 국내 정치, 국제 여론, 그리고 소련과의 힘 겨루기가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물이었음을 보여준다. 결과적으로 남베트남은 미국의 지원이 끊기자 단기간에 무너졌고, 이후 베트남은 통일 국가로 재편됐다. 이런 사례는 우크라이나 분쟁에서도 중요한 함의를 제공한다.

     

    미국이 일방적으로 지원을 축소하거나 러시아와의 관계 개선을 꾀할 경우, 우크라이나는 자칫 남베트남이 겪었던 운명을 맞을 수도 있다는 경고가 나온다. 이는 분쟁 당사국이 스스로 협상 테이블에서 주도권을 유지하고, 국제사회의 다각적인 지원과 관심을 유도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역설적으로 보여준다. 그리고 강대국 외교의 이면을 간파하는 역사적 통찰 역시 여전히 유효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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