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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콘스탄티노플의 몰락과 그 이후
    경제에 투영된 역사 2023. 5. 17. 21:30

    1453년, 콘스탄티노플의 몰락은 역사의 큰 흐름을 바꿔놓았습니다. 비잔틴 제국의 종말을 의미하는 이 사건은  동서양 무역의 중심지를 오스만 제국의 통제로 넘겨줌으로써 전 세계의 무역 패턴에 큰 변화를 가져왔습니다. 더 나아가, 이러한 변화는 대항해 시대를 촉발시키는 계기가 되었는데, 현대 글로벌화의 초석을 놓게 된 사건이었습니다.

     

    Siege of Constantinople from Bibliothèque nationale manuscript Français

    콘스탄티노플의 중요성

    전략적 위치에 자리 잡고 있던 콘스탄티노플은 비잔틴 제국의 수도이자, 동서양 무역의 중심지였습니다. 동서양의 교류를 가능하게 하는 실크로드의 중요한 거점으로서, 상품, 아이디어, 그리고 문화의 교류를 촉진하는 중요한 역할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1453년, 오스만 제국에 의한 콘스탄티노플의 공방전에 이은 함락으로 이러한 상황을 완전히 바꾸게 되었습니다. 오스만 제국의 술탄 메흐메트 2세는 콘스탄티노플을 장악함으로써, 동서양 무역의 교차로를 통제하게 되었습니다.

     

    콘스탄티노플 공방전

    오스만 제국의 젊은 지도자 메흐메드 2세는 콘스탄티노플을 장악하려는 강력한 결의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를 위해 그는 보스포루스 해협의 유럽 쪽에 루멜리 히사리(Rumeli Hisari)라는 요새를 건설했는데, 이는 오스만 제국이 흑해로부터 콘스탄티노플에 대한 지원을 차단하는 효과를 가져왔습니다. 또한, 메흐메드 2세는 대규모 병력을 모집하였고, "바실리카(Basilica)"라는 이름의 거대한 대포를 포함한 중화포를 갖추고 있었습니다. 600파운드의 돌을 1마일 이상 던질 수 있는 엄청난 위력을 자랑하였습니다.

     

    1453년 4월 6일부터 오스만 제국은 콘스탄티노플의 성벽에 대한 끊임없는 포격을 실시했습니다. 그러나 매일 밤, 콘스탄티누스 11세 황제가 이끄는 비잔틴군은 성벽을 수리하는 데 성공하여 오스만의 공격을 잠시 늦출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결국 견디기 어려운 상황에 놓이게 되었습니다. 해상으로의 새로운 전략을 시도한 오스만제국은 그들은 도시의 북쪽 항구인 골든 혼의 입구를 막는 체인을 우회하기 위해 기름칠된 통나무를 이용하여 배를 육지로 운반하는 방법을 사용해서 해상에서도 공격을 유지할 수 있었습니다.

     

    5월 29일 새벽, 마지막 공격이 시작되었습니다. 처음 두 차례의 공격은 실패했지만, 세 번째 공격에서는 야니사리(정예보병부대)가 도시 방어선을 뚫는 데 성공했습니다. 마지막 전투에서 콘스탄티누스 11세 황제는 전사하였고 시신은 발견되지 않았다고 전해집니다. 콘스탄티노플이 오스만 제국에게 항복한 후, 메흐메드 2세는 로마의 시저라는 칭호를 취하고 도시의 이름을 이스탄불로 바꾸었습니다. 비잔틴 제국은 사라지고, 오스만 제국의 동유럽 확장이 시작되었습니다.

     

    무역 경로의 변화

    콘스탄티노플의 함락과 비잔틴제국의 몰락은 유럽의 상인들에게 엄청난 충격을 주었습니다. 그들은 아시아로 가던 기존의 육로를 이용할 수 없게 되었고, 동서양 무역의 중심이 오스만 제국으로 옮겨지자, 그들은 새로운 무역 경로를 찾아야만 했습니다. 이에 따라, 포르투갈과 스페인 등의 해양 국가들은 새로운 항로를 찾기 위한 탐사를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이는 대항해 시대의 개막을 알리게 되었습니다.

     

    대항해 시대의 시작

    새로운 무역 경로를 찾아야 하는 이 과제는 대항해 시대의 시작을 알렸습니다. 포르투갈과 스페인과 같은 국가들이 선두를 지휘하여 오스만 제국을 우회하는 아시아로 향하는 해상 루트를 찾기 위한 탐험을 후원했습니다. 가장 주목할 만한 탐험가로는 바스코 다 가마, 크리스토퍼 콜럼버스, 페르디난드 마젤란 등이 있습니다. 이들은 동양의 풍부한 시장에 직접 접근하기 위해 위험을 무릅쓰고 항해에 나섰습니다.

     

    항해 기술의 발전

    대항해 시대는 항해 기술과 방법의 큰 발전을 이끌었습니다. 유럽의 선원들은 미지의 바다를 탐험하면서 정밀한 지도를 작성했고, 조선 기술을 향상하며, 나침반 같은 항해 도구를 개선하였습니다. 이런 혁신들은 보다 안전하고 효율적인 항해를 가능케 하였고, 선원들은 더욱 정확하고 확신에 찬 항해를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경제 확장과 식민주의

    콘스탄티노플의 몰락 이후 시작된 탐험 여행들은 경제적으로도 큰 변화를 가져왔습니다. 유럽의 강대국들은 새로 발견된 항로를 따라 식민지와 교역소를 세우면서 국제 무역 네트워크를 확장하였습니다. 향신료, 비단, 귀금속과 같은 이국적인 상품들의 유입은 경제 성장을 촉진하였고, 중상주의를 부추겼습니다. 이 시기에는 네덜란드 동인도회사와 영국 동인도회사와 같은 강력한 무역 회사들이 등장하여 유럽의 무역 영향력을 더욱 강화시켰습니다.

     

    문화 교류와 지식 공유

    대항해 시대는 경제적 세계 재편뿐만 아니라, 광범위한 문화 교류와 지식 공유를 장려했습니다. 유럽의 탐험가들은 아시아, 아프리카, 아메리카의 다양한 문화와 만나고 그들의 전통, 신화, 언어를 기록하였습니다. 이 기록들은 사람들이 다른 문화에 대한 이해를 높이는 데 도움을 주었습니다. 또한, 이런 교류는 식물, 동물, 기술 등의 전파를 통해 과학과 기술의 발전에도 기여하였습니다.

     

    콘스탄티노플의 몰락은 단순히 한 도시의 끝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새로운 시대의 시작을 알린 계기였습니다. 아시아로 향하던 전통적인 육로가 끊기면서 유럽 상인들은 새로운 길을 개척해야 했고, 이는 미지의 바다를 탐험하는 결과로 이어졌습니다. 이러한 항해술의 발전, 식민지 개척, 상품과 아이디어의 교환은 경제, 문화, 지적 수준에서 세계를 변화시켰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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