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잔혹사 이야기 #3 목을 베고 공주를 얻다사건과 이슈 2025. 6. 20. 12:59
마한(馬韓)은 고대 한반도 남서부에 존재했던 정치 연맹체로, 오늘날 전라·충청 지역을 포함한 50여 개의 소국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그 중심이었던 목지국에서는, 전쟁이 발발하자 적장의 머리를 가져오는 이에게 공주를 아내로 주겠다는 약속이 전해 내려온다. 혼인과 참수를 정치 권력의 수단으로 활용했던 당시 사회의 실상을 보여주는 중요한 기록으로 남아있다. 전쟁과 혼인의 접점, 그 속에 숨겨진 권위의 논리를 들여다본다. 더불어 고구려를 세운 주몽과 비류국 송양왕의 대립 또한, 피를 흘리지 않고 권력을 얻는 다른 방식의 설화를 통해 알아보자.
삼한의 중심, 마한이라는 이름
한반도에 삼한(三韓)이라는 정치 연맹체가 존재하던 시대에 마한은 가장 넓은 세력을 형성하고 있었다. 이 연맹은 기원전 3세기부터 기원후 4세기까지 약 700년 가까이 유지되었으며, 현재의 전라도 전역과 충청도, 경기 남부에 걸쳐 있었다. 마한은 50개가 넘는 소국들로 이루어졌으며, 이들은 독립적으로 운영되면서도 일정한 정치적 질서를 공유하고 있었다.
이 가운데 목지국은 마한의 중심 세력이었고, 삼한 전체의 맹주인 진왕(辰王)을 배출한 것으로 기록에 전한다. 진왕은 단순한 명칭이 아니라, 각 소국 위에 군림하는 권력적 존재로서 기능했으며, 이는 마한이 단순히 분산된 집단이 아니라 연맹형 군장국가로서 일정한 통합성을 가졌음을 뜻한다.
충남 아산 일대를 비롯한 지역에서는 목지국의 흔적으로 추정되는 유적과 유물이 다수 발굴되었다. 특히 청동기 유물과 무덤 양식은 다른 지역보다 복잡하고 크기가 커, 정치적 중심지였음을 뒷받침해준다. 마한의 영향력은 단순한 세력 확장에서 그치지 않고, 주변 소국과의 연합 또는 견제를 통해 권력 균형을 조정하는 데 능숙한 정치 운영을 보여주었다.
목을 가져오면 공주를 주겠다
마한 시기의 전쟁 이야기 중 하나는 매우 구체적인 조건이 담긴 전설로 전해진다. 어느 전투에서 불리해진 왕이 병사들에게 적장의 목을 가져오면 자신의 외동딸을 아내로 삼게 하겠다고 한 것이다. 이는 단순히 가족을 내거는 감정적 호소가 아니라, 생존을 위한 정치적 결단이었고, 동시에 전투를 끝낼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기도 했다.
참수와 혼인의 정치학
당시 사회에서 혼인은 지극히 현실적인 권력 운영의 일부였다. 공주를 시집보낸다는 의미는 단순한 가족사를 넘어서, 왕실의 권위를 상대에게 공유하고, 향후 통치 구도를 조정하는 행위였다. 이 설화 속 '공주'는 실재하는 인물이자 정치적 의미를 동시에 지닌 상징적 존재였다.
비슷한 사례는 중국 고대 문헌에서도 찾을 수 있다. 『좌전』에 기록된 진나라의 이야기를 보면, 전쟁에서 공을 세운 장수에게 딸을 하사한 군주의 결정이 훗날 국정 운영에까지 영향을 미쳤다. 마한의 설화 역시 이처럼 혼인이 권력의 분배이자 정치적 보상의 한 형태였음을 뚜렷하게 보여준다.
참수라는 권력 기술
적장의 목을 베어오는 행위는 단순한 무공 과시나 복수의 감정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었다. 참수는 고대 동아시아에서 권력의 확실한 신호였고, 형벌의 가장 극단적인 형태였다. 고조선의 8조법에서도 살인을 저지른 자를 참수형에 처한다고 명시되어 있었으며, 이 처벌은 단순한 응징을 넘어 질서를 유지하는 통치 수단이었다.
정치적 계산이 깔리다
마한 왕이 전투 중 적장의 목을 요구한 이유는 그 안에 정치적 계산이 담겨 있었기 때문이다. 적장의 머리는 하나의 시신이 아니라, 그 나라의 권위와 체제, 정신을 대표하는 대상이었다. 이 목을 전시하거나 공표함으로써 마한은 적국의 사기를 꺾고, 반대로 자기 군의 사기를 끌어올리는 효과를 노렸다.
상징적 행위가 된 참수
참수는 정복자와 피정복자 모두에게 강력한 상징으로 작용했다. 피정복자에게는 두려움의 대상이 되었고, 왕에게는 명백한 통치의 증표가 되었다. 참수를 완수한 이는 단숨에 지도자의 신임을 얻을 수 있었고, 경우에 따라 권력 승계의 흐름까지도 바꿀 수 있는 위치에 오를 수 있었다. 이처럼 참수는 고대 사회에서 정치적 질서를 형성하고 유지하는 데 직접적으로 작용한 요소였다.
주몽과 송양, 권력을 두고 벌인 패권 경쟁
마한의 설화가 직접적인 참수와 무력 충돌을 중심으로 전개된다면, 고구려의 건국 이야기인 주몽 서사는 전혀 다른 성격을 띤다. 주몽은 해모수와 유화 사이에서 태어난 인물로 기록되어 있으며, 출생 당시부터 신성한 성격을 부여받았다. 이러한 요소는 주몽이 하늘과 땅을 잇는 중재자로 인식되었음을 보여준다.
다른듯 같은, 정치적인 배경이 가져온 상황
그는 부여에서 성장하며 활을 잘 쏘는 능력을 인정받았으나, 정치적인 이유로 남쪽으로 이동해 졸본 지역에서 새로운 나라를 세웠다. 이 지역은 비류국과 국경을 접하고 있었고, 자연스럽게 두 세력 간에는 긴장이 발생했다. 이 충돌은 군사적 충돌로 이어지지 않고, 지략과 상징을 앞세운 방식으로 전개되었다.
『삼국사기』에 실린 내용에 따르면 주몽은 활솜씨로 상대를 압도하고, 전통적인 주술과 자연 징조를 이용해 송양왕의 항복을 받아냈다. 이후 송양은 패배한 자로 끝나지 않고, 다물 지역의 도주로 임명되어 고구려 체제 안에서 일정한 권한을 부여받는다.
이 과정은 단순한 승패의 결과가 아니다, 패권을 다루는 방식의 유연함을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피를 흘리는 전투를 벗어나 정치적 흡수와 구조 개편을 통해서 권력 구도를 바꾸는 고대 국가 운영의 또 다른 방식을 보여주는 사례이다.
신화 속 왕권, 현실의 권력 구조를 반영하다
주몽과 송양의 이야기는 전설로만 전해지지만, 그 내용은 정치 구조와 권력 분배를 반영하고 있는 것이다. 주몽은 하늘의 혈통을 지녔다고 기록되어 있으며, 송양은 기존 정치 체계를 대표하는 인물로 등장한다. 두 인물의 갈등과 타협은 단순한 신화적 갈등이 아니라, 새로운 통치 체제가 기존 질서와 충돌한 후 조율되는 과정을 담고 있다.
마한 설화는 전투와 혈연, 그리고 희생을 바탕으로 한 권력 운영의 방식이다. 공주를 전리품처럼 여기는 장면은 생명을 대가로 내거는 것처럼 보이지만, 당시 권력을 유지하거나 확대하기 위한 현실적인 결정이었다. 적장의 목을 가져오고, 왕족과 혼인을 맺는 행위는 명확한 지위 상승과 정치적 승인을 뜻했다.
현대의 정치 구조에서도 유사한 형태는 여전히 존재한다. 공개적 갈등 없이 권력이 이동되는 방식이나, 특정 연합을 통한 세력 구성은 과거의 전략과 다르지 않다. 마한과 고구려의 이야기는 지나간 시대의 설화가 아니라, 지금도 되풀이되는 권력 작동 방식의 구조를 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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