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잔혹사 이야기 #2 왕좌의 게임 ‘브랜’의 뿌리, 켈트 신화의 브란사건과 이슈 2025. 5. 5. 17:03
켈트 신화 속 브란(Bran the Blessed)의 전설은 단순한 이야기 이상의 의미를 품고 있다. 말하는 머리, 죽은 후에도 지혜를 나누는 존재, 그리고 국가를 수호하는 수호령의 이미지까지—브란의 신성한 머리는 고대 켈트인의 영혼관과 종교적 상징주의가 응축된 강력한 상징물이다.
브란, 인간인가 신인가: 초월적 존재의 탄생
브란은 웨일스 신화인 '마비노기온' 두 번째 이야기(Second Branch of the Mabinogi)의 중심 인물로, 리르(Llŷr)와 페나르둔(Penarddun)의 아들이다. 그의 이름은 웨일스어로 '까마귀'를 뜻하며, 이는 죽음과 예언, 지혜의 상징이다. 까마귀는 북유럽과 켈트 신화 전반에서 초자연적 중재자로서 자주 등장하는 동물이다.
브란은 인간임에도 거대한 거인으로 묘사된다. 그가 등장하는 이야기에서는 집에 들어갈 수 없을 정도로 커다란 존재로 표현되며, 바다를 걸어서 건널 수 있을 만큼 위대한 힘을 가진 자다. 이는 단순한 허구가 아니라, 그가 반신반인 또는 신격화된 조상임을 의미하는 전형적인 상징이다.
그의 별명 'The Blessed(축복받은 자)'는 단지 왕으로서의 존귀함을 넘어, 영적 권능이 있는 존재로 인식되었음을 드러낸다. 그는 단순한 전사나 지도자가 아니라, 죽음 이후에도 공동체에 영향을 끼치는 초월적 존재로 자리잡는다.
전쟁의 뿌리: 브랜웬의 결혼과 파국의 서막
브란의 여동생 브랜웬은 아일랜드 왕 마톨흐(Matholwch)와 정략 결혼하게 된다. 이는 브리튼과 아일랜드 간의 동맹을 위한 정치적 결합이었다. 그러나 브란의 이복형제 에프니시엔(Efnysien)이 자신을 배제한 결혼 결정에 분노해 마톨흐의 말들을 훼손하며 전쟁의 불씨를 당긴다.
브란은 이 사태를 수습하기 위해 아일랜드에 마법의 가마솥(Cauldron of Rebirth)을 선물한다. 이 가마솥은 죽은 자를 부활시킬 수 있는 신비한 유물로, 이후 전쟁 중 수많은 죽은 병사들이 이 가마솥을 통해 되살아나는 공포의 장면으로 이어진다.
브랜웬은 아일랜드에서 학대를 받으며 하녀로 전락하고, 새를 통해 형제에게 구원을 요청한다. 브란은 이에 응답하여 아일랜드로 원정 전쟁을 감행하고, 이 과정에서 그가 "거대한 산이 바다를 건너오는 것처럼 보였다"는 묘사는 그의 신격성과 초월성을 더욱 강조한다.
죽음과 부활의 경계선: 신성한 머리의 전설
전쟁 중 브란은 독화살에 맞아 죽음을 맞이한다. 그러나 그는 죽기 직전 동료들에게 자신의 머리를 잘라 영국으로 가져가라 명령하며, 놀라운 예언과 위로의 기능을 유지한다. 그의 머리는 부패하지 않고 계속해서 말을 하며, 동료들에게 즐거움을 주고 지도자로서의 역할을 지속한다.
이후 생존자 7명은 브란의 머리와 함께 하를레크(Harlech)에서 7년을 보내고, 그왈레스(Gwales) 섬에서 80년간 시간을 잊은 채 머물게 된다. 그러나 금지된 문이 열리는 순간, 브란의 머리는 말을 멈추고 이 마법 같은 상태는 끝나버린다.
결국 브란의 머리는 런던의 화이트 힐(White Hill, 현재의 런던탑 부근)에 묻힌다. 전설에 따르면 그의 머리가 그곳에 있는 한, 영국은 외세의 침략으로부터 안전할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다. 이는 브란의 머리가 일종의 국가 수호령 역할을 한다는 신화적 설정이다.
켈트의 헤드 컬트: 머리에 깃든 영혼과 권능
브란의 머리 이야기는 켈트 사회에 광범위하게 퍼져 있던 '헤드 컬트(Head Cult)', 즉 머리 숭배 전통의 대표적 신화화이다. 고대 켈트인들은 머리를 단순한 신체 일부가 아니라 영혼이 거하는 장소이자 신령한 힘이 집중된 중심으로 여겼다.
고고학자 앤 로스(Anne Ross)는 "켈트 문화에서 머리는 신성의 상징이자 지혜, 영적 통찰, 저승의 힘을 지닌 장소로 여겨졌다"고 설명한다. 전사들은 전투에서 적의 머리를 잘라 전리품처럼 보관하거나, 삼나무 기름으로 방부처리해 자랑스레 전시하기도 했다. 이는 단순한 전쟁 기념품이 아니라, 상대의 영혼과 힘을 흡수하려는 행위였다.
브란의 머리는 이 믿음을 신화적으로 체현한 존재다. 말하는 머리, 지도력과 지혜를 잃지 않는 머리, 나라를 지키는 수호 머리는 모두 켈트인들이 머리를 어떻게 여겼는지를 명확히 보여준다. 이는 현대에 이르러서도 켈트 문화의 신비롭고 초월적인 면모를 상징하는 주요 테마로 남아 있다.
피셔 킹과 브랜 스타크
브란 신화는 단지 고대 전승에 머물지 않고, 성배 전설의 '피셔 킹(Fisher King)' 신화나 현대 판타지 시리즈인 '왕좌의 게임' 속 브랜 스타크(Bran Stark)에게까지 영향을 미친다. 피셔 킹은 상처 입은 왕이자 땅의 수호자라는 콘셉트를 지닌 인물로, 머리와 신성한 상처, 예언과 연관되어 있다.
브랜 스타크는 이름부터 브란과 유사할 뿐 아니라, 하반신이 마비되고 예언 능력을 지니며 결국 왕이 되는 과정까지 신화적 요소를 공유한다. 이는 조지 R.R. 마틴이 켈트 신화에서 영향을 받았음을 보여주는 대표 사례로 자주 언급된다.
이 외에도 브란의 기원은 갈리아 족장 브렌누스(Brennus)의 실존 전설에서 유래했을 가능성, 11세기 아일랜드의 왕 브라이언 보루(Brian Boru) 전설과의 접점 등도 지적되고 있다. 이는 하나의 신화가 다양한 역사적, 문화적 사건을 흡수하고 재해석되며 살아 있는 이야기로 이어지고 있음을 의미한다.
브란, 죽음을 넘어 공동체를 지키는 존재
브란의 신화는 켈트 문화의 정신과 죽음에 대한 인식을 명확하게 보여준다. 단지 한 전쟁 영웅의 죽음이 아니라, 공동체를 위한 희생, 죽음을 초월한 지도력, 그리고 영혼의 불멸성에 대한 믿음을 상징한다.
브란의 신성한 머리는 지도자의 사후에도 지속되는 보호와 예언의 상징으로, 켈트인의 집단 무의식 속에서 중요한 자리로 남았다. 그의 이야기는 오늘날에도 문화, 문학, 신화 연구 속에서 강한 영향력을 발휘하며, 고대인의 세계관을 되새기게 만든다.
죽은 자의 머리가 살아남은 자들을 인도하고, 국가의 안전을 지킨다는 이 신화는 단순한 전설이 아니라, 인간의 집단적 상상력과 영적 갈망이 만들어낸 심오한 상징 체계다. 브란은 죽음을 넘어서 존재하는 지도자였고, 그 머리는 여전히 전설 속에서 말을 걸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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