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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잔혹사 이야기 #4 샤를 8세 사망의 숨겨진 진실
    사건과 이슈 2025. 6. 23. 14:40

    1498년, 프랑스의 왕 샤를 8세는 앙부아즈 성에서 갑작스럽게 사망했다. 표면적으로는 단순한 사고사였다. 그러나 500여 년이 지난 지금, 과학자들과 역사학자들은 이 죽음 뒤에 감춰진 의학적 무지, 사회적 편견, 그리고 정치적 조작의 가능성에 주목하고 있다. 왕의 최후를 둘러싼 이 복잡한 미스터리는 중세 말기 유럽의 정신과 권력의 실상을 엿보게 한다.

    잔혹사 이야기 #4 샤를 8세 사망의 숨겨진 진실

    1498년 4월 7일, 충돌로 시작된 운명

    샤를 8세는 죄드폼(jeu de paume) 경기 관람을 위해 앙부아즈 성 내부의 아클벡 갤러리를 지나던 중, 머리를 낮은 문설주에 부딪혔다. 그의 키는 약 152cm로, 1.6m 내외였던 통로에서 일어난 충돌은 치명적이지 않은 듯 보였다. 실제로 그는 이후 아무 이상 없이 경기를 관람하고 대화도 나눴다.

    하지만 이는 '허니문 페이즈'라 불리는 두부외상의 전형적 증상이었다. 곧이어 의식 소실, 경련, 언어 장애가 뒤따랐다. 목격자들은 그가 스스로 짚단 위에 눕는 모습을 보았다고 증언했다. 이는 단순한 기절이 아닌 복잡 부분 발작, 즉 국소성 뇌전증의 가능성을 시사한다.

    아클벡 갤러리의 구조와 사고 가능성

    샤를 8세가 사고를 당한 장소인 아클벡 갤러리는 해자 쪽으로 이어지는 좁고 낮은 통로였다. 건축 당시의 기준으로 보면 1.6미터 내외의 낮은 높이였으며, 돌로 마감된 석조 문설주는 부딪히기에 매우 위험한 구조였다. 왕의 키가 152cm였던 점을 고려하면 평상시엔 문제가 없었겠지만, 급하게 이동하던 중에는 눈에 잘 띄지 않는 문턱이었다는 점이 사고의 핵심이다.

    당시 죄드폼의 궁정 내 인기

    죄드폼은 당시 프랑스 궁정에서 귀족 사이에 매우 유행하던 스포츠로, 현대 테니스의 원형이라 불린다. 왕과 왕비가 함께 관람하는 것은 매우 드문 일이었기에 이날의 일정은 매우 특별했으며, 왕이 서둘러 움직이게 된 이유이기도 했다. 궁정 내에서 죄드폼은 단순한 오락이 아닌 권위와 취향을 과시하는 수단으로 기능했다.

    초기 증상으로 본 의학적인 견해

    사고 직후 샤를 8세는 별다른 이상을 보이지 않았고, 평소처럼 말하고 행동했다. 이는 외상 후 몇 시간 동안 증상이 나타나지 않는 '허니문 페이즈'에 해당하며, 뇌손상의 전형적인 패턴이다. 이후 언어 장애, 경련, 혼돈 상태가 나타났다는 목격자 증언은 단순 뇌진탕이 아닌 국소성 뇌전증의 가능성을 보여준다. 이러한 증상은 오늘날 의학에서는 즉각적인 진단과 대응이 필요한 신경학적 징후로 간주된다.

    '허니문 페이즈' 개념

    '허니문 페이즈'란 두부 외상 후 일정 시간 동안 아무 이상 없이 정상처럼 보이는 시기를 일컫는 의학 용어로, 현대 신경외과학에서 매우 중요한 개념이다. 이 개념이 알려지기까지는 20세기 중반 이후 의학 기술의 발달이 필요했으며, 중세에는 이러한 경과를 오인하기 쉬웠다. 샤를 8세의 사례는 이 개념이 적용될 수 있는 역사적 사례 중 하나로, 사고 당시의 혼란스러운 판단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단서를 제공한다.

    무지와 지연, 왕을 죽인 것은 통념?

    사고 발생 후, 의사는 무려 6시간이 지나서야 호출되었다. 이는 단지 물리적 거리의 문제가 아니었다. 당시 뇌전증은 "악마의 병"이라 불리며 왕실에서는 터부시되었고, 측근들조차 단순 기절로 여기며 오판했다. 당시 의학은 사혈이나 약초 수준에 머물러 있었고, 뇌 질환에 대한 이해는 거의 전무했다. 샤를 8세는 어릴 때부터 두통과 신경성 증상이 있었던 것으로 보이며, 이는 사고 이전부터의 질환 가능성을 시사한다.

    중세 프랑스의 의학적 한계와 통념

    15세기 말 프랑스에서 의학은 여전히 갈레노스와 히포크라테스 이론에 크게 의존하고 있었다. 뇌와 신경계에 대한 이해는 거의 전무했고, 정신적 증상이나 경련은 신의 징벌이나 악마의 저주로 해석되었다. 왕가와 귀족층은 이러한 질환을 숨기기 급급했고, 왕실에서는 뇌전증 같은 증상을 공공연히 인정하는 것을 꺼렸다.

    두부외상에 대한 당시 치료법

    당시 두부외상은 사혈(bloodletting)과 약초를 기본으로 한 처방이 일반적이었다. 머리를 다친 환자에게는 침술이나 부황, 향초 치료가 사용되었고, 뇌압 상승이나 내출혈에 대한 개념은 전혀 존재하지 않았다. 외과적 개입은 드물었고, 환자의 상태 악화는 대개 숙명으로 받아들여졌다.

    사고 직후 왕이 정상처럼 보이자, 그의 측근들은 긴급한 대응을 하지 않았다 뇌전증과 같은 질환에 대한 당시 사회적 금기와 두려움이 작용한 결과였다. 만약 왕이 그런 병에 걸렸다고 공식화된다면, 이는 왕실의 정당성에 큰 타격을 줄 수 있었다.

    왕의 질병 이력에 대한 정황

    샤를 8세는 사고 이전에도 종종 심한 두통과 언어적 혼란, 손 떨림 등의 증상을 보였다는 기록이 있다. 베네치아 대사의 보고에 따르면, 그는 신경성 경련과 말을 더듬는 모습을 보였다고 한다. 이는 이미 뇌 질환이 진행되고 있었음을 시사하며, 충돌 사고가 단지 촉매제 역할을 했을 가능성을 뒷받침한다.

    새로운 진실의 가능성

    2021년 발표된 연구에서, 샤를 8세가 이탈리아 원정 중 매독에 감염되었고, 그로 인해 신경매독에 이르렀다는 설을 제기되었다. 매독은 유럽에 처음 상륙한 신종 질병이었고, 뇌전증은 3기 매독의 대표적 증상 중 하나였다.

    샤를 8세는 1495년 나폴리 주둔 당시, 유럽에서 매독이 가장 심했던 시기에 머물렀으며, 많은 병사들과 함께 감염됐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이후 3년간의 잠복기를 거쳐, 1498년 급성 뇌전증으로 사망했다는 시나리오는 당시의 모든 상황과 부합한다.

    나폴리 원정과 매독의 유입 경로

    샤를 8세는 1494년부터 이탈리아 원정을 감행하며 나폴리까지 진격했다. 당시 나폴리는 매독이 유럽 전역으로 퍼져 나가는 진원지 중 하나였다. 프랑스 군대는 나폴리 점령 당시, 현지 여성과의 접촉, 전염병 확산 지역에서의 장기간 체류 등으로 인해 집단 감염의 위험에 노출되었다. 이로 인해 샤를 8세 본인도 매독에 감염되었을 가능성이 높다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신경매독의 발병 과정과 증상

    매독은 트레포네마 팔리둠균에 의해 발생하는 질환으로, 초기에는 피부 발진이나 궤양 형태로 나타난다. 치료받지 않은 채 진행되면 3기에는 중추신경계를 침범하는 신경매독으로 발전할 수 있다. 이 단계에서는 언어 장애, 시각장애, 운동 실조, 발작 등 다양한 신경학적 증상이 동반된다. 현대 연구자들은 샤를 8세의 뇌전증적 증상과 급작스런 사망이 이러한 신경매독의 말기 증상과 일치한다고 본다.

    샤를 8세의 건강 기록과 변화

    왕의 건강 상태는 사고 몇 년 전부터 점차 악화되고 있었던 정황이 남아 있다. 외교관 보고서에 따르면, 그는 불면, 경련, 집중력 저하, 언어 흐림 등의 증상을 보였다고 한다. 이는 매독의 잠복기 이후 발생하는 신경학적 증상과 매우 유사하다. 특히 사고 당일, 경련과 언어 장애를 동반한 의식 소실은 단순 외상이 아닌 복합적 내과적 병인이 있었음을 암시한다.

    매독이 불러온 공포의 파장

    15세기 말, 유럽에 퍼진 매독은 당시 사람들에게 유사 이래 가장 끔찍한 질병 중 하나로 받아들여졌다. 치유 방법이 없던 당시 상황에서 매독은 "신의 심판"으로 간주되었고, 감염자는 사회적 낙인을 피할 수 없었다. 프랑스에서는 이 질병을 '이탈리아인의 병'으로, 이탈리아에서는 '프랑스병'으로 불렀을 정도로 혐오와 공포의 대상이었다. 샤를 8세가 이 질병에 감염되었다는 사실은 왕실의 도덕적 위신을 흔들 수 있었기에, 철저히 숨겨졌을 가능성이 크다.

    진실은 어떻게 조작되는가

    샤를 8세의 죽음은 발루아 왕가 직계의 단절을 의미했다. 자녀가 모두 요절했기 때문에 왕위는 방계의 루이 12세로 넘어갔다. 만약 전 왕이 매독으로, 혹은 뇌전증이라는 '신의 저주'로 사망한 것으로 기록된다면 이는 왕실의 정통성과 도덕성에 큰 상처를 입힐 수 있었다.

    이 때문에 루이 12세와 왕실은 그의 죽음을 단순한 사고로 은폐했을 가능성이 높다. 당시의 공식 기록은 충돌 사고만을 강조하며, 증상의 전개나 신경학적 정황은 의도적으로 누락됐다. 외교관 필리프 드 코민조차 회고록에서 이 부분을 모호하게 표현하며 '운명의 장난'으로 돌렸다.

    발루아 왕조의 계승 문제

    샤를 8세는 자녀를 남기지 못한 채 요절했기 때문에, 발루아 왕조는 직계 계승이 불가능한 상황에 직면했다. 이는 프랑스 왕실 역사에서 중요한 전환점으로, 이후 왕위는 방계 혈통인 오를레앙 공 루이에게 넘어갔다. 이러한 계승은 당시 귀족 사회와 교회로부터도 정당성을 인정받아야 했기 때문에, 왕의 죽음에 관한 공식 기록은 특히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루이 12세의 정통성 확립 전략

    루이 12세는 샤를 8세의 사망 직후 정권을 안정시키기 위해 여러 정치적 조치를 단행했다. 그는 브르타뉴 공국의 상속자인 안 드 브르타뉴와 결혼하여 지역 세력을 아우르고, 샤를의 유산을 통합함으로써 왕실 권위를 강화했다. 또한 전 왕의 사망 원인을 단순 사고사로 발표함으로써 왕가의 도덕성과 신성함을 보호하는 전략을 취했다.

    필리프 드 코민의 기록 해석

    샤를 8세의 측근이자 외교관이었던 필리프 드 코민은 『회상록』에서 이 사건을 언급하며 '완벽한 운명의 장난'이라는 표현을 썼다. 이는 표면적으로는 운명론적 해석처럼 보이나, 당시 뇌전증에 대한 사회적 낙인을 고려할 때 사실을 우회적으로 암시한 표현일 가능성이 크다. 코민은 샤를의 죽음을 의도적으로 모호하게 서술함으로써, 왕실과 사회의 정치적 균형을 지키려 했던 것으로 보인다.

     

    중세와 근세 초기의 공식 연대기나 왕실 기록은 종종 권력자들의 필요에 따라 편집되거나 일부 삭제되곤 했다. 샤를 8세의 사망 관련 기록 역시 증상의 상세한 묘사가 생략되어 있으며, 일부 외교 문서와 목격자 진술은 서로 충돌하는 부분이 존재한다. 이러한 점은 당시 프랑스 왕실이 민감한 정보를 은폐했을 가능성을 강하게 시사하며, 역사 기록을 해석할 때 단순한 문자 정보 이상의 비판적 접근이 필요함을 보여준다.

    유해, 생드니 대성당에 잠들다

    샤를 8세의 유해는 현재 프랑스 왕족이 묻힌 생드니 대성당에 안치되어 있다. 이곳은 습도와 온도가 비교적 일정하게 유지되며, 유해의 보존 상태가 양호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당시의 매장 방식과 석관 구조는 신체 일부, 특히 두개골과 장골 등 주요 골격이 현재까지도 분석 가능한 형태로 남아 있을 가능성을 높인다.

    매독균 DNA 분석 기술과 가능성

    최근 고고유전학과 병리학은 15세기 이후 인류 유해에서도 병원체 DNA를 복원하는 데 성공하고 있다. 트레포네마 팔리둠(Treponema pallidum)이라는 매독균은 특정한 조건에서 골조직에 흔적을 남기며, 유전자 서열을 통해 감염 여부를 판별할 수 있다. 샤를 8세의 유해에서 이러한 분석이 가능하다면, 그의 사망 원인에 대한 과학적 증거 확보가 가능해질 것이다.

     

    어찌 되었건 샤를 8세의 죽음은 단순한 두부 충돌로 일어난 사건이 아닌 것이다. 중세 말기 유럽이 안고 있던 의학적 무지와 질병에 대한 사회적 공포, 그리고 권력을 위한 정치적 은폐가 뒤엉킨 복합적 사건으로 볼 수 있는 것이다. 500년의 시간이 흐른 지금, 과학적 발전으로 그날의 정확한 진실이 밝혀질 날을 고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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