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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의 이름, 사이포, 역사에서 지워진 아시리아인사건과 이슈 2025. 6. 24. 18:06
1915년, 세계가 전쟁에 휘말려 있던 그 시기, 오스만 제국의 변방에서는 또 하나의 비극이 서서히 전개되고 있었다. '사이포(Sayfo)' — 검을 뜻하는 시리아어 — 이 단어는 아시리아인들의 대학살을 상징하는 이름으로, 50만에서 75만 명이 희생된 인류 역사상 가장 잔혹한 참극 중 하나다.
메소포타미아의 후예, 아시리아인의 정체성
아시리아인은 단순히 한 민족이라기보다는 고대 문명의 유산을 오늘날까지 간직한 살아있는 역사였다. 그들은 티그리스강과 유프라테스강 사이에서 찬란한 문명을 이룩한 메소포타미아의 직계 후손이었으며, 바빌론의 벽돌과 니네베의 기록물, 그리고 바위에 새긴 쐐기문자를 전수해온 사람들이다. 또한, 이들은 예수가 사용했다 전해지는 아람어를 여전히 일상어로 쓰며, 아람어 성경을 읽는 마지막 민족으로도 남아 있다.
기원후 1세기 무렵, 아시리아인들은 기독교로 개종했고, 이후 시리아 정교회, 아시리아 동방교회, 칼데아 가톨릭교회라는 세 가지 주요 교파로 나뉘었다. 이들은 신앙을 중심으로 독립된 마을과 수도원 공동체를 구성했으며, 외세의 통제에서 벗어난 산악지대와 외딴 계곡 속에서 수 세기 동안 자치적 생활을 이어갔다. 하카리 산맥은 그들에게 단순한 거주지가 아닌, 정신적 성소였고, 종교적 중심지였다.
그러나 19세기에 접어들며 오스만 제국의 중앙집권화 정책이 본격화되자, 그들의 자율성은 무너지기 시작했다. 제국은 민족 정체성을 인정하지 않고, 단순히 종교적 교파로 분류해 통제하려 했다. 밀레트 제도는 표면적으로는 종교적 자치권을 보장하는 체계였지만, 실제로는 정치적 권리를 박탈하고, 상호 간 갈등을 유도하는 구조였다. 아시리아인들은 이러한 체제 속에서 점차 권력을 상실하고, 제국 내에서 외딴 존재로 고립되어 갔다.
불붙은 증오: 민족주의와 오스만의 복수심
오스만 제국은 19세기 말부터 유럽 열강의 압박과 연이은 군사적 패배로 인해 급속히 쇠퇴하고 있었다. 제국의 국경은 갈수록 좁아졌고, 한때 종교적 관용과 다민족 공존을 자랑하던 체제는 내부 불만과 의심으로 가득 찼다. 그 불만은 주로 제국 내 기독교 소수민족들에게 향했다. 특히 1877년 러시아-튀르크 전쟁에서의 참패는 제국 내부의 공포심을 증폭시켰고, 오스만 통치자들은 기독교인들이 러시아와 결탁할 수 있다는 의심을 품게 되었다.
이러한 배경 속에서 아르메니아인과 아시리아인은 점점 더 의심의 눈초리를 받았다. 이들은 전통적으로 제국의 산악지대나 변경 지역에 자치적으로 살아가던 공동체였고, 제국에 대한 충성보다는 종교 공동체 중심의 삶을 중시했다. 이는 중앙 권력의 입장에서 보자면 정치적 위협으로 간주되기에 충분했다.
결국 이슬람 민병대 하미디예 부대가 결성되었다. 이는 술탄 압둘 하미드 2세가 직접 승인한 무장 쿠르드족 부대로, 이들은 제국의 '비이슬람 분자'들을 감시하고 탄압하는 임무를 수행했다. 1894년부터 1896년까지 이어진 '하미디안 학살'은 이들의 첫 대규모 작전이었다. 그 중심에는 아르메니아인들이 있었지만, 아시리아인도 예외가 아니었다. 1895년 한 해에만 약 5만 5천 명의 아시리아인이 살해되었고, 특히 하카리 산을 중심으로 한 아시리아 정교회 공동체는 참혹한 공격을 받았다.
하카리 지역의 아시리아인들은 부족 중심의 무장 공동체를 형성하고 있었고, 쿠르드족 및 오스만 군대의 공격에 맞서 방어선을 구축하려 했지만, 중화기와 정규군 앞에서는 무력했다. 일부 지역에서는 학살을 피하기 위해 이웃 무슬림 공동체와의 협력을 시도했으나, 성공 사례는 극히 드물었다. 이 학살은 이후 벌어질 '사이포'의 전조이자 예고편이었다.
사이포, 검으로 쓴 이름
1915년 봄, 오스만 제국 내무부 장관 탈라트 파샤는 이란 국경과 접한 카자르 제국 인근의 아시리아인 거주지를 주시하고 있었다. 겉으로는 군사적 이유, 즉 외세 침투와 반란의 가능성을 차단하기 위한 전략이라고 포장했지만, 그 이면에는 명백한 민족 청소 계획이 숨어 있었다. 그는 암호화된 전문을 통해 아시리아인들을 강제 이주시키고, 언어와 문화를 단절시키며 민족 정체성을 말살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이 명령은 단순한 군사 작전이 아닌, 제도화된 인종말살의 서막이었다.
같은 해, 아르메니아인 학살과 함께 오스만 정부는 아시리아인, 그리스인 기독교 공동체에 대한 전면적인 박해를 개시했다. 학살은 하카리 산맥에서 시작됐다. 수세기 동안 아시리아인들의 정신적 성역이었던 이곳은 이제 피의 제단이 되었다. 오스만 정규군과 친정부 성향의 쿠르드족 민병대는 협력하여 마을을 포위했고, 화약과 칼날, 굶주림과 공포로 공동체를 해체시켰다. 수천 명의 여성과 어린이, 노인까지도 예외가 아니었으며, 수많은 여성은 강간당한 후 이슬람으로의 개종을 거부했다는 이유로 잔혹하게 살해되었다. 한 기록에 따르면, 아이들은 어른들 앞에서 돌로 머리를 맞아 죽었고, 성직자는 기름을 부어 산 채로 불태워졌다.
디야르바키르 지역에서는 '학살자'로 악명 높은 메메드 레시드 주지사가 잔혹 행위의 중심에 있었다. 그는 1915년 5월 25일, 지역 내 아르메니아와 아시리아 공동체의 지도자 800여 명을 체포해, 티그리스 강변의 절벽으로 끌고 간 뒤 집단 살해했다. 이어서 지역 전체로 학살이 확산되었고, 메메드 레시드는 이를 효율적으로 관리된 작전처럼 집행했다. 그는 오스만 제국이 아닌, 제국 내 무슬림 우월주의 질서를 세우려는 사상적 신념에 따라 기독교인 제거를 정당화했으며, 그의 명령으로 인해 수천 명이 하루아침에 사라졌다.
끝없는 절규, 말 없는 숫자들
이 학살로 희생된 아시리아인의 수는 최소 25만 명에서 많게는 75만 명에 달한다고 여러 사료가 전한다. 이는 당시 아시리아인 전체 인구의 절반 이상이거나, 심지어 75%에 가까운 수치였다. 도시와 지역별 피해 통계를 살펴보면, 미디야트 지역에서만 2만 5천 명이 처형되거나 학살되었고, 디야르베키르에서는 5천 명, 마르딘에서는 6천 명이 희생되었다. 이들 외에도 제지라-이븐-오마르에서 2만 1천 명, 쿠드샤니스에서 7천 명, 우르파와 하르풋에서도 각각 수천 명이 사망했다. 특히 많은 이들은 학살 자체보다 사막 지대로의 강제 이송 도중, 극심한 탈수와 굶주림, 무더위 속에서 쓰러져 죽었다.
학살의 방식은 그야말로 상상할 수 있는 모든 폭력이 동원된 잔혹함 그 자체였다. 총에 맞아 죽는 이들은 오히려 '행운'이었다. 어린아이들은 돌로 머리를 맞고 강가에서 숨이 끊어졌으며, 임산부는 배를 가른 뒤 태아를 꺼내보이는 만행까지 자행되었다. 여성들은 집단 강간 후 이슬람으로 개종할 것을 강요받았고, 이를 거부하면 몸이 조각조각 찢겼다. 남성들은 참수되거나 불에 태워졌으며, 시신은 티그리스 강에 던져져 '보이지 않는 무덤'으로 사라졌다. 종교 지도자들은 수녀복이나 사제복을 입은 채로 산 채로 꿰매져 불에 던져지거나, 마을 광장에서 공개 처형되었다.
이 학살에는 오스만 제국의 군대만이 아니라, 지역 관리와 경찰, 심지어 이웃에 살던 무슬림 주민과 쿠르드 민병대까지 가담했다. 어떤 마을에서는 수십 년 간 평화롭게 지내던 이웃이 하루아침에 살인자가 되었고, 공동체 내부의 신뢰는 산산이 부서졌다. 이는 단순한 전시 범죄를 넘어선, 종교적 증오와 민족적 적대감이 폭발한 사회적 광기였다.
그리하여 아시리아인에게 돌아온 것은 단지 육체적 죽음이 아니라, 기억조차 지워진 역사적 망각이었다. 희생자들은 무덤조차 남기지 못했고, 생존자들은 조국을 잃고 떠돌아야 했다. 그리고 이 비극은 오랫동안 국제사회에서 거의 말해지지 않았다.
기억의 부재와 현대의 인식 투쟁
사이포는 아르메니아 집단학살의 그림자에 가려 오랫동안 주목받지 못했다. 서구 외교관, 선교사, 인도주의자들의 기록에는 명확히 등장했지만, 역사 교육과 국제 정치에서는 외면됐다.
그러나 1990년대 이후, 아시리아 디아스포라는 기억을 되살리기 위한 구술사 프로젝트와 다큐멘터리를 제작했다. UCLA와 협업한 '사이포 센터'는 생존자의 증언을 수집하고 보존하는 작업을 이어가고 있으며, 스위스와 독일, 프랑스 등은 이 학살을 공식 인정했다. 미국도 바이든 대통령이 공식 언급한 바 있다.
언어와 문화의 소멸
아시리아인들은 지금도 시리아와 이라크 등지에서 극단주의 조직들의 위협에 노출되어 있으며, 그들의 언어인 아람어는 사실상 사라질 위기에 놓여 있다. 예수가 사용했다고 전해지는 이 언어는, 아시리아인의 멸절과 함께 역사의 무덤 속으로 사라질지도 모른다.
그들의 수는 이미 1980년대 후반 140만 명에서 약 40만 명으로 줄었다. 사이포는 단지 과거의 학살이 아니라, 오늘도 진행 중인 존재 소멸의 서사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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