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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타하리만이 아니다: 여성 스파이의 전설전쟁과 전투의 역사 2025. 3. 26. 18:30
역사 속 전쟁과 첩보전은 남성의 전유물처럼 여겨져 왔다. 그림자 속에서 활약한 수많은 여성 스파이들은 전쟁의 판도를 바꿨고, 연합군의 작전 성공이나 적군의 계획 차단에 결정적 기여를 하며 각국의 전쟁 전략에 큰 영향을 끼쳤다. 에이미 소프는 해군 암호 해독에 기여했고, 낸시 웨이크는 레지스탕스 활동으로 프랑스 해방에 일조했다. 그들은 미모, 지성, 담력, 사교술을 무기로 때로는 누구보다 효과적으로 작전을 수행했으며, 비밀리에 역사에 자신의 흔적을 새겼다.
👠제1차 세계대전의 신화, 마타하리
마타하리(본명: 마가레타 거트루이다 젤러)는 네덜란드 출신의 무희로, 제1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과 프랑스 양쪽에서 활동한 이중 스파이로 알려졌다.
프랑스 정부는 그녀를 독일의 정보원이라 판단해 1917년 총살형을 내렸다. 그러나 1999년 영국 MI5의 보고서에 따르면 그녀가 중요한 정보를 넘겼다는 증거는 부족했다. 실제로 마타하리는 상징적 존재로 과대평가되었지만, 여성 스파이의 이미지에 큰 영향을 끼친 인물로 평가받는다.
🪂제2차 세계대전, 전장을 누빈 여성들
에이미 소프
미국 미네소타 주 출신으로, 해군 장교의 딸로 태어난 에이미 엘리자베스 소프( Amy Elizabeth Thorpe )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코드네임 신시아(Cynthia)'로 활동한 MI6 및 OSS 소속의 전설적인 여성 스파이였다.
뛰어난 미모와 지성으로 '달의 여신'이라 불리며 외교관들의 연인으로 위장하여 프랑스 주재 이탈리아 대사관 및 비시 프랑스 정부 등 주요 외교 시설에 침투했고, 1937년에는 독일군의 에니그마 암호 해독에도 기여했다.
1941년 이탈리아 해군 암호, 1942년에는 비시 프랑스 해군 암호 탈취 작전을 성공시켜 연합군의 북아프리카 상륙작전(횃불작전) 승리에 결정적 역할을 했다. 그녀의 활동 대부분은 여전히 기밀로 유지되고 있으며, FBI 문서 65페이지 중 단 5%만이 공개되었을 정도다.
에이미 소프는 현대 첩보 역사에서 가장 성공적인 여성 스파이 중 한 명으로 손꼽힌다.
낸시 웨이크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영국 특수작전본부(SOE)에서 활동한 전설적인 여성 스파이로, 게슈타포에게 '흰쥐(White Mouse)'라는 별명을 얻었다. 1912년 뉴질랜드에서 태어나 호주로 이주한 그녀는 언론인으로 파리에 정착했고, 나치 독일의 침공 이후 프랑스 레지스탕스에 합류해 연락책으로 활약했다.
1942년 피레네 산맥을 넘어 스페인으로 탈출한 후 SOE에 합류해 8개월간의 훈련을 받고 'Madame Andrée'라는 가명으로 프랑스에 낙하산 투입되었다.
D-데이 직전에는 프랑스 마퀴와 협력해 무기 수송, 사보타주, 독일군 시설 공격 등을 지휘했으며, 특히 무전기가 파괴된 상황에서 500km를 자전거로 주행해 정보를 전달한 업적으로 유명하다.
그녀는 전후 조지 훈장, 프랑스 크루아 드 게르, 미국 자유 메달 등 여러 국가에서 최고 훈장을 수여받았으며, 2011년 98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버지니아 홀
1906년 미국 메릴랜드에서 태어난 그녀는 사냥 사고로 한쪽 다리를 절단하고 의족 '커스버트'를 착용했음에도 불구하고 제2차 세계대전 당시 가장 용감한 연합군 스파이 중 한 명으로 활약했다.
1941년 SOE 소속으로 프랑스에 침투해 리옹에서 '헤클러' 네트워크를 구축하고, 조종사 구출, 요원 지원, 저항운동 조직 등 다양한 임무를 수행했다. 마우작 교도소 탈옥 작전은 '전쟁 중 가장 유용한 작전 중 하나'로 평가받았고, 그녀는 곧 게슈타포의 최고 수배자가 되었다.
이후 의족을 착용한 채 피레네 산맥을 넘어 스페인으로 탈출했고, OSS 요원으로 다시 프랑스에 침투해 D-데이 직전 1,500명의 레지스탕스 전투원을 훈련시키고 사보타주 임무를 지휘했다.
전후 미군 공로십자장을 수여받았고, CIA 창립 후에도 요원으로 근무하며 스파이 전술 개발에 기여했다. 그녀의 용기와 신념은 신체적 한계를 뛰어넘은 전설로 남아 있다.
이들은 철저한 위장과 신체적 제약을 뛰어넘는 용기로 전세에 결정적 영향을 끼쳤다.
🧨한국전쟁과 CIA의 '래빗' 여성들
한국전쟁(1950~1953) 중 미국 CIA는 북한 지역에서 인간정보(HUMINT)를 수집하기 위해 '래빗(Rabbits)'이라는 코드명을 부여한 여성 정보원들을 운용했다.
이 작전은 극동사령부(FECOM) 정보부 주도하에 이루어졌으며, 1950년 9월부터 1951년 6월 사이 약 1,000명의 요원이 적지에 투입되었다. 이 중 70% 이상이 살아 돌아와 북한의 군사 상황과 전선 배치, 질병 발생 등에 관한 중요한 정보를 제공했다.
이 여성 요원들은 고위급 북한군 또는 중국군 장교에게 접근해 가능한 최전선까지 동행하라는 임무를 부여받았으며, 무기나 무전기 없이 개인 능력만으로 임무를 수행했다. 접근 대상의 신뢰를 얻은 뒤에는 연합군이 있는 쪽으로 이동해 스스로 포로로 잡히고, 사전에 약속된 신호를 통해 정체를 밝히며 첩보 내용을 보고했다.
작전은 극도로 위험했으며, C-47 항공기를 이용해 낙하산으로 적진 깊숙이 투입되었고, 일단 투입되면 걸어서 귀환해야 했다. 현장에서는 SCR-300 보병용 무전기를 통해 보급 요청과 정보 전송이 이뤄졌고, 공중에서는 긴 안테나를 장착한 항공기가 이 신호를 중계했다.
한 여성 요원은 간호장교로 위장해 원산에 침투한 뒤 페스트 발병 여부를 확인함으로써 연합군의 방역 대응에 결정적 역할을 했다. 이들은 당시 남성 요원보다 생존율이 높았으며, 미 육군 기록에 따르면 여성 스파이 생존율은 약 70%로 남성보다 높았다.
CIA 분석에 따르면 여성 요원들은 감정 통제력과 인간관계 구축 능력에서 뛰어난 장점을 보였다. 또한 이들 중 다수는 KLO(한국연락사무소)와 같은 조직에 소속되어 유엔군 지휘 하에 게릴라 작전 및 첩보 임무에 투입되었으며, 2022년에는 한국 국방부가 이들 민간 여성 요원에게 처음으로 공식적인 재정 보상을 지급한다고 발표했다.
여성 스파이들이 마주한 치명적 위험
여성 스파이들은 당시 사회적 인식으로 인해 남성보다 의심을 덜 받는 이점이 있었지만, 체포 시에는 오히려 더욱 극심한 고문과 처형의 위험에 직면했다. 여성은 정보전에서 위협 요소로 간주되지 않는 경우가 많았으나, 일단 정체가 발각되면 무자비한 처벌을 받았다.
제2차 세계대전 중 나치에게 붙잡힌 여성 요원들은 라벤스브뤼크 수용소로 보내졌으며, 담배 화상, 발톱 제거 등의 고문을 당했다. '리옹의 도살자' 바르비는 특히 잔혹한 고문으로 악명이 높았다. 오데트 샌섬은 이러한 고문 속에서도 정보를 누설하지 않고 살아남은 사례로 유명하다.
🎗비극 속에서도 빛난 용기
사라 아론손
1890년 태어난 유대인 여성으로, 제1차 세계대전 당시 영국을 위해 활동한 유대인 스파이 조직 NILI의 핵심 인물이었다. 그녀는 아버지 에프라임, 오빠 츠비와 함께 조직 활동을 이끌었으며, 동료 요세프 리샨스키와 함께 작전을 수행하다 1917년 터키군에 의해 은신처가 포위되었다.
터키군은 가족을 고문하며 정보를 캐내려 했으나, 사라는 끝까지 침묵을 지켰다. 나사렛으로 이송되기 직전 화장실을 빌미로 잠시 집에 들어간 그녀는 미리 숨겨둔 권총으로 자살을 시도했으며, 며칠 뒤 사망했다.
사라는 죽기 전 동지들에게 전할 쪽지를 남기며 끝까지 동료들을 지키는 결연한 모습을 보여주었다.
누르 이나야트 칸
1914년 모스크바에서 태어난 인도계 무슬림 여성으로, 아버지는 수피 철학자 하즈랏 인아얏 칸이며, 인도 마이소르 왕국의 티푸 술탄의 후손으로 '인도 공주'라 불렸다.
소르본 대학에서 아동심리학을 전공하고 파리 음악원에서 음악을 공부했으며, 나치 독일이 프랑스를 침공하자 영국으로 탈출해 영국 특수작전집행부(SOE)에 자원 입대했다.
1943년 프랑스로 파견된 첫 여성 무전병으로 코드명 '매들린'을 사용하며 레지스탕스를 지원했다. 1943년 10월 13일 게슈타포에 체포되어 혹독한 고문을 당했으나 끝까지 정보를 누설하지 않았고, 1944년 9월 13일 다하우 강제수용소에서 총살당했다.
사후 1949년 조지 십자훈장을 받았으며, 2012년 런던 고든스퀘어가든에 기념상이 세워졌다.
이들 모두는 단순한 스파이가 아닌, 자유와 저항의 상징이었다.
🎖기억되어야 할 그림자 속 영웅들
이 여성들 대부분은 전쟁 후에도 역사서에 제대로 이름이 오르지 못했다. 누르 이나야트 칸은 제2차 세계대전 중 SOE 요원으로 활약했지만, 그녀의 공적은 오랜 시간이 흐른 후에야 재조명되었다.
한국전쟁 당시 '래빗'으로 불린 여성 첩보원들 역시 CIA 문서 외에는 거의 기록이 남아 있지 않다. 대부분은 간호사, 미용사, 교사, 학생 등 평범한 일상 속 인물이었다. 하지만 전장이 이들에게 평범함을 허락하지 않았고, 그들은 국가와 인류를 위해 자신의 안위를 포기했다.
역사적 기록에 제대로 남지 않았다는 점은, 지금 우리가 더욱 조명해야 할 이유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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