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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리 못지않은 드라마, ‘위대한 후퇴’ 이야기
    전쟁과 전투의 역사 2025. 3. 12. 19:39

    역사는 승자의 이름을 크게 부르지만, 때로는 패배 속에서도 결코 잊혀지지 않는 위대한 퇴각이 존재한다. 압도적 열세나 돌이킬 수 없는 상황에서, 지휘관의 결단과 병사의 단결, 민간의 협력이 어우러져 후퇴 자체가 역사적 분기점이 된 사례들이다. 이러한 후퇴는 단순한 패배담을 넘어 인류가 힘들 때 어떻게 역경을 극복해 나가는지를 보여주는 살아 있는 교훈으로 남았다. 전투에서 밀리더라도 전열을 재정비하고, 생존자를 최대한 보존하며, 다시 일어설 발판을 마련하는 역사의 순간들은, 세대를 넘어 수많은 이들에게 도전 정신과 용기를 전해 준다. 이번 글에서는 던케르크, 갈리폴리, 열천인의 귀환(아나바시스), 알렉산더 대왕의 인도 철수, 중국 홍군의 대장정을 통해, ‘패배했지만 위대했다’고 일컬어지는 역사 속 후퇴들을 살펴본다.

     

    승리 못지않은 드라마, ‘위대한 후퇴’ 이야기

     

    덩케르크: 포위에서 피어난 기적

    2차 세계대전 초기에 벌어진 덩케르크 철수 작전은 독일군의 맹공에 의해 프랑스 북부 해안 덩케르크에 고립된 연합군이 보여 준 놀라운 생존극이다. ‘다이너모 작전’으로 불린 이 철수 계획은 군함은 물론 민간 선박까지 동원해, 30만 명 이상의 병사를 영국으로 탈출시키는 데 성공한다. 비록 육상전에서 패배했으나, 본토 방어에 중요한 인적 자원을 보존했다는 점에서, 후퇴가 만들어 낸 최대의 성과물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1940년 덩케르크에 버려진 영국 대공포

     

    유럽 전선의 암운

    영국과 프랑스 연합군이 벨기에와 프랑스 북부 지역에서 빠르게 후퇴하게 된 계기는, 독일군의 ‘전격전(Blitzkrieg)’ 전략이었다. 이는 급속도로 기갑 부대를 투입해 적의 방어선을 돌파하는 전술로, 연합군은 방어 체계가 무너지면서 무질서한 철수를 강행할 수밖에 없었다. 독일군의 폭격기가 항공우위를 장악해 해안지대를 위협하고, 보급선까지 방해받는 상황에서 덩케르크에 발이 묶여 버린 연합군의 상태는 절망적이었다. 하지만 동시에 영국 본토에서는 절박감이 커지며, 정부와 군부, 그리고 민간사회가 일치단결해 철수 계획 수립에 몰두하는 계기가 마련된다. 이처럼 어두운 전황 속에서도, 작은 희망의 불씨가 후퇴라는 형태로 타오를 수 있음을 보여 준 사례다.

     

    민관 합동의 총력

    계획명 ‘다이너모’ 하에 영국은 각종 선박을 총동원한다. 군함 뿐 아니라 개인 어선, 요트, 화물선까지 투입해 병사들을 한꺼번에 후송하는 작전은 전례 없는 시도였다. 독일군의 계속되는 폭격과 해안 포위에도 불구하고, 숙련된 해군과 민간 자원봉사자들이 한마음으로 움직인 결과, 던케르크 해안을 오가는 보트들은 수없이 왕복했다. 제약이 많았지만, 자국군을 반드시 본토로 귀환시키겠다는 집념이 결국 ‘기적’이라 부를 만한 대규모 철수를 완성했다. 후방에서 물자를 공급하고, 희생을 감수하면서도 한 명이라도 더 구조하기 위해 협력한 민간인들의 존재야말로 이 작전을 빛나게 했다.

     

    1940년 5월 30일, 병력을 싣고 덩케르크 앞바다에서 침몰하는 프랑스 구축함 부라스크(BOURRASQUE)

     

    사투 끝에 거둔 성과

    결과적으로 던케르크 해안에서 철수한 병력은 예상을 훨씬 웃도는 규모였고, 이로써 영국과 프랑스가 전력을 재정비할 수 있는 결정적 시간을 벌었다. 비록 프랑스 점령은 피하지 못했지만, 영국은 이 생존 인력으로 본토 방어 태세를 강화하고, 훗날 노르망디 상륙 작전 등의 반격에 나설 수 있었다. 폭격의 공포와 끊임없는 해상 위협을 넘어선 이 철수는, “패배하더라도 모든 것을 잃는 것은 아니다”라는 명확한 교훈을 전 세계에 남겼다.

     


    갈리폴리 철수: 고난과 신념의 기록

    제1차 세계대전 중인 1915년, 갈리폴리 전투는 영국·프랑스 연합군과 오스만 제국 사이에서 벌어진 치열한 교전이었다. 해협을 장악해 러시아로 이어지는 보급로를 확보하려던 연합군의 작전은 난항에 부딪혔고, 결국 전략적 실패를 인정해야 했다. 연합군은 갈리폴리 반도를 포기하며 철수하기에 이르는데, 이 작전의 전개와 퇴각 과정은 협상의 결단력, 병사들의 희생, 그리고 전쟁의 본질적 처참함을 담고 있다.

     

     

    오스만 제국 방어선의 현실

    당시 오스만 제국은 쇠퇴기에 접어들었다고 평가받았으나, 갈리폴리에 배치된 병력과 지휘체계는 의외로 공고했다. 전선을 장악하는 고지와 해협 주변 지형은 쉽게 돌파할 수 없는 자연 요새 역할을 했다. 또한 독일 등 동맹 세력의 지원으로 해안 포진이 탄탄해지면서, 상륙을 시도하는 연합군은 큰 피해를 입었다. 대포와 기관총이 지휘하는 해안절벽은 조금만 움직여도 공격이 쏟아지는 ‘죽음의 지대’가 되었고, 돌파에 대한 희망은 점차 사그라졌다. 상대를 만만히 보았던 판단착오는 전황을 급격히 불리하게 바꾸는 핵심 원인이었다.

     

     

    연합군의 교착 상태

    일단 상륙에 성공한 병력도 지형적 악조건과 보급 문제로 고립되거나 작전에 혼선을 빚었다. 지도부 간 이견과 협조 부재는 작전이 원활히 진행되지 못한 이유 중 하나였다. 전투의 양상은 해안가와 고지대 간을 오가며 이루어졌고, 잠시 점령했다 해도 확고히 진지를 구축할 만한 자원이 부족해 상황은 극도로 악화되었다. 병사들의 사기는 필연적으로 떨어져 갔으며, 전염병과 위생 문제까지 겹쳐 전투 능력은 날로 약해졌다. 결국 승산 없는 소모전이 계속되자, 작전의 총책임자들은 서서히 철수 결정을 고려하기 시작한다.

     

    1915년 5월 24일 안작 휴전의 한 장면, 적군의 병사들이 아무도 없는 땅에서 전사자를 묻는 모습

     

    망설임 끝에 내린 결정

    연합군이 갈리폴리를 떠나기로 결정한 것은 여러 모로 쉽지 않은 선택이었다. 그러나 계속되는 병력 손실과 보급 한계로 더 이상의 버팀은 의미가 없다고 판단했다. 1915년 말부터 1916년 초까지 단계적 철수가 진행되었는데, 이 과정에서 연합군은 적의 공세를 최소화하기 위해 철수 전략을 치밀하게 계획했다. 해안에 목마나 지뢰를 설치하거나, 소음이 나는 장치를 두어 일부 병력이 남아 있는 것처럼 위장하기도 했다. 이러한 노력이 결실을 맺어, 상대적으로 적은 인명 피해로 대규모 철수가 완수되었다. 패배였지만, 퇴각 자체가 재기를 위한 전열을 재정비하는 계기가 되었고, 훗날 전쟁의 향방을 다시 설계할 수 있는 토대를 마련했다.


    열천인의 귀환: 그리스 용병의 대행군

    기원전 401년경, 페르시아 제국의 왕위 다툼에 가담한 그리스 용병 약 만여 명이 패배 후 적지 한복판에 남겨지게 된다. 페르시아 내전에서 고용주를 잃은 이들은 장군 크세노폰의 지휘 아래 약 2,400km를 걸어 그리스 본토로 돌아가는데, 이 대장정이 바로 ‘아나바시스(Anabasis)’로 기록되어 있다. 전력상 열세와 낯선 땅을 뛰어넘은 의지와 단결은, 후퇴가 때로는 가장 용감한 선택임을 보여 준 대표적 사례다.

    The Anabasis of Xenophon

     

    페르시아 내전과 용병의 딜레마

    그리스 용병들은 키루스 2세 편에서 싸우다 키루스가 전사하자 한순간에 표류 상태가 된다. 월급을 받지 못하게 되고, 오히려 적국 한복판에 고립된 처지가 돼 버렸다. 용병이라는 특성상 그들은 본국의 정규군 지원을 기대하기 어렵고, 주변 국가의 도움도 받을 수 없다. 생사를 가르는 문제 앞에서 잔류할 것인지, 아니면 목숨 걸고 귀환을 시도할 것인지에 대한 토론이 이어졌고, 결국 다수 의견이 ‘귀환’으로 모아졌다. 이 결정은 단순한 후퇴가 아니었다, 모두가 살아서 고향 땅을 밟고 싶다는 강렬한 동기가 작용했던 것이다.

     

     

    크세노폰과 규율의 재정립

    지도부를 잃은 그리스 용병들은 지휘관을 새로 선출해야 했다. 이때 소크라테스의 제자였던 크세노폰이 전면에 나서, 군사 지휘체계를 재구성한다. 군량과 전투 자원을 확보하기 위해 현지 부족과 교섭하거나 때로는 교전해야 했으며, 함께 힘을 모아야만 대규모 행군 중 발생하는 각종 문제를 극복할 수 있었다. 크세노폰은 혼란스러운 분위기를 가라앉히고, 병사들 사이에 확고한 규율을 심어 주어 ‘우리는 하나’라는 인식을 공유하게 했다. 그의 냉철한 판단과 동지애는 대장정 기간 동안 용병들의 고된 행군을 지탱하는 정신적 버팀목이 되었다.

     

    장대한 2,400km의 서사

    거대한 강을 건너고, 높은 산악 지대를 넘으며, 이들은 끊임없이 적대 세력의 습격을 받았다. 식량과 물자가 부족해 굶주리거나 질병으로 쓰러지는 병사도 부지기수였다. 그럼에도 지리적 특성과 기후, 작은 마을까지도 철저히 조사하고 적절히 협상하거나 전투를 벌여 길을 확보하는 방식으로, 결국 흑해 해안가에 도달한다. “바다다!”라는 병사들의 함성이 아나바시스 기록의 하이라이트로 꼽히는데, 이 감격적인 순간은 인내와 단결, 그리고 끝없이 이어지는 고난을 극복한 인간 의지의 상징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알렉산더 대왕, 인도에서의 귀환

    알렉산더 대왕은 동방원정으로 페르시아를 정복한 뒤 인도까지 발을 들였으나, 부하 장병들의 피로와 강력한 토착 왕국들의 저항에 부딪혀 결국 귀환을 결정한다. 불패 신화를 자랑하던 그 역시 무리한 확장이 몰고 오는 결과를 직접 체감했고, 이 후퇴로 말미암아 헬레니즘 문화의 폭과 한계를 동시에 확인하게 해준다.

     

    인도 원정의 분수령

    알렉산더가 인도까지 진출한 것은 동방원정을 통한 대제국 건설의 정점이었다. 그러나 현지 기후와 코끼리를 앞세운 군대, 거듭되는 전투로 인한 사상자 증가 등의 문제는 그가 파죽지세로 달려오던 기세를 한 번에 꺾어 놓았다. 병사들은 먼 타국에서 끝없이 이어지는 전쟁에 지쳐 있었고, 지휘부가 아무리 명령을 내려도 고단함과 향수병을 이겨내기란 쉽지 않았다. 인더스 강 너머로 진격하는 데 대한 동요가 커지면서,

    알렉산더는 여전히 전투에 대한 열망이 강했음에도 불구하고 군의 총의에 따를 수밖에 없었다.

     

    전술 혁신과 군단 피로

    알렉산더는 이전까지 정복지마다 지역 특성을 반영한 전술 혁신을 시도했다. 여러 종족의 특색 있는 병력을 혼합 편성하거나, 상대가 가진 핵심 전술을 역이용하는 방식으로 전투에서 우위를 점했다. 그러나 인도 지역의 자연환경과 거대한 영토는 이러한 대담한 전술마저 억누르기 충분했다. 쉴 새 없이 진군하고 전투해야 했던 마케도니아 및 그리스 병사들은 질병과 폭염, 낯선 풍토병까지 감당해야 했다. 이미 페르시아를 넘어오면서 누적된 피로가 극에 달했고, 계절마다 달라지는 기상과 지형 조건이 부대를 더욱 소모시켰다.

     

     

    헬레니즘 세계의 확장과 한계

    결국 알렉산더는 인더스 강에서 더 나아가지 않고 서쪽으로 되돌아가는 결정을 내렸다. 이 귀환로 자체도 험난했지만, 수로와 육로를 혼합 활용하며 비교적 안정적으로 마케도니아 방향으로 복귀할 수 있었다. 이후 알렉산더가 일찍 세상을 떠나자, 그의 뒤를 이을 후계자들은 제국의 방대한 영토를 유지하는 데 어려움을 겪었다. 그럼에도 헬레니즘 문화가 인도 지역 일부에 전파된 것은, 무력 충돌의 부산물 가운데서도 이룩된 의미 있는 성과로 꼽힌다. 알렉산더의 후퇴는 ‘더 이상 전쟁을 지속할 수 없음’을 시인했다는 점에서 제국 건설의 한계를 극명하게 드러내 준 사건이기도 하다.


    중국 홍군: 대장정으로 개척한 미래

    1934년 시작된 중국 공산당 홍군(紅軍)의 대장정은, 국민당 군대의 강력한 토벌 작전에 몰려 어쩔 수 없이 감행한 후퇴였다. 그러나 1만2천km에 달하는 이 도보 행군은 훗날 중화인민공화국 성립의 기반이 되었고, 패배를 딛고 재기를 이루어 낸 극적인 사례로 남았다.

     

     

    초기 근거지의 몰락

    1930년대 초, 중국 공산당은 강서성 등지에 소비에트 지역을 세워 세력을 확장했으나, 장제스(蔣介石)의 집중 포위 작전에 상당한 타격을 입었다. 여러 차례 소규모 전투에서 민중의 지지를 받던 홍군이라 해도 중화민국 정부군의 대대적인 포위망을 완벽하게 뚫기는 어려웠다. 교전이 이어지며 병력과 무기가 고갈되어 갔고, 인근 지역 농민들조차 전쟁 피로로 지쳐가던 시점에, 지도부는 결국 현 거점을 포기하고 원정길을 떠나기로 결심했다. 이 결단은 “패배로부터 배운 교훈을 미래에 투자하자”라는 메시지를 내포한 것이었다.

     

    1만2천km의 행군

    1934년 가을부터 시작된 대장정은 광시, 호남, 귀주, 운남, 사천, 감숙, 섬서 등 내륙을 관통했다. 높은 산맥과 척박한 황토지대를 지나고, 극심한 기후 변화를 겪는 과정에서 홍군 내 탈영자나 사망자가 속출했다. 국민당군의 추격이 집요해 전략적 접근이 필요했으며, 주민들과 갈등이 생기는 지역마다 설득과 협상을 통해 식량을 조달해야 했다. 대장정은 말 그대로 인내와 고난의 연속이었으나, 그 과정에서 마오쩌둥(毛澤東)을 중심으로 한 지도부가 영향력을 강화해 부대 통합을 이끌어 냈다.

     

    북부 근거지에서 싹튼 재기

    결국 홍군은 섬서성의 옌안(延安)을 새로운 근거지로 삼아 재정비에 성공한다. 지친 병력을 보충하고 지역 주민과 협력 체계를 구축하면서, 이후 일본 침략에 맞서는 항일전쟁에서도 일부 주도적 역할을 맡게 된다. 이 대장정으로 적지 않은 인명 손실을 겪었지만, 생존자들은 “패배가 끝이 아니라 재기의 시작”이라는 공감대를 형성하며 단결을 이어 갔다. 훗날 공산당이 정권을 수립할 때, 대장정은 지지층에게 ‘당이 어떤 시련에도 흔들리지 않는다’는 상징으로 자리매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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