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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리핀-미국 전쟁, 에밀리오 아기날도와 민족주의의 비상전쟁과 전투의 역사 2025. 2. 6. 20:04
필리핀-미국 전쟁(Philippine–American War)은 1899년부터 1902년까지 필리핀과 미국이 치열하게 충돌했던 식민지 시대의 중요한 분쟁이다. 필리핀은 스페인 통치로부터 벗어난 직후 미국과의 이해관계 충돌로 다시 전쟁에 휘말렸다. 미국은 스페인과 맺은 파리조약(1898년)으로 필리핀을 양도받았고, 필리핀 민족주의 세력은 에밀리오 아기날도를 중심으로 독립국가 건설을 열망했다. 이 전쟁은 양측 모두에 커다란 희생을 치르게 했고, 필리핀인의 민족 정체성과 미국의 제국주의 정책을 다시금 조명하게 했다. 구체적인 전투 양상부터 당시 국제정세와 미국 내부의 반전 의견, 전후 필리핀 사회 변화까지, 필리핀-미국 전쟁은 20세기 초반 동남아시아와 미국 외교사에 깊은 자취를 남겼다. 특히 무력 충돌 중 발생한 민간인 피해와 공세적 식민정책은 필리핀의 민족 정체성을 강화시키는 동시에, 미국 내부에서도 제국주의에 대한 비판 여론을 자극했다. 그 결과 전쟁이 종전된 후에도 필리핀과 미국의 관계는 오랫동안 복잡하게 이어지며, 현대 필리핀의 정치·사회·문화 전반에 크고 작은 영향을 끼쳤다.
필리핀 반란 당시 참호에 있는 20 캔자스 미군 병사들의 모습 배경과 전쟁의 시작
미국은 스페인과의 전쟁에서 승리하고 파리조약을 통해 필리핀을 식민 지배권에 편입했다. 그러나 필리핀 독립을 선포했던 에밀리오 아기날도를 중심으로 한 민족주의 세력은 외세 지배가 아닌 완전한 자치와 주권을 요구했다. 이로 인해 무력 충돌이 가속화되었고, 1899년 2월 첫 교전이 발발했다. 필리핀-미국 전쟁은 초기에는 정규군 간 대결 형식을 띠었으나, 미국이 압도적인 군사력을 동원하면서 전선이 빠르게 미국 쪽으로 기울었다. 그러나 필리핀 저항 세력은 기민한 게릴라전으로 맞서며 전쟁의 양상을 장기전으로 끌고 갔다.
군복을 입은 필리핀의 에밀리오 아기날도 에밀리오 아기날도의 독립 선언과 충돌
아기날도는 1898년 6월 12일 필리핀의 독립을 선언했다. 이는 스페인에서 해방된 뒤 곧바로 새 주권국가를 수립하려는 필리핀 민족의 열망을 반영한다. 그러나 파리조약이 체결되며, 미국은 필리핀을 식민지화하려는 움직임을 보였다. 아기날도는 미국을 한때 스페인에 맞선 동맹으로 여겼으나, 미국의 필리핀 지배 의도가 명확해지자 강한 반발로 이어졌다. 이 과정에서 마닐라 인근에서 충돌이 시작되었고, 필리핀군은 기습적 공격과 지형 활용을 통해 초반에 선전했으나, 곧 미군의 대규모 증원으로 어려움에 봉착했다.
미국의 식민정책과 필리핀 민족주의
미국은 19세기 말부터 본격적으로 제국주의 성향을 띠며 태평양 지역으로 세력을 확장했다. 하와이 병합(1898년)과 함께 필리핀도 이 전략적 거점 중 하나로 여겨졌다. 미 의회 일부에서는 필리핀 지배의 정당성을 놓고 논란이 일었고, 여론도 둘로 갈렸다. 그러나 지도부는 아시아에서의 군사적, 경제적 이익을 얻기 위해 필리핀 통치를 강행했다. 반면 필리핀 민족주의자들은 다케타트(독립운동 비밀 모임) 등을 조직해 독립을 위한 명분을 강화했고, 전통적인 카티푸난 혁명 정신을 이어받아 저항 의식을 고취했다.
‘친미’ vs ‘반미’ 필리핀인들 사이의 갈등
스페인 지배가 무너지자 일부 필리핀 지역 지도자들은 빠른 근대화와 경제적 이익을 이유로 미국 통치에 호의적이었다. 반면 민족주의 성향이 강한 계층과 농민·민중은 새로운 외세 지배에 맞서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로 인해 필리핀 내부에서도 친미 세력과 반미 세력 간 긴장이 커졌고, 지역마다 다른 양상으로 전쟁에 참여하거나 방관했다. 이 분열은 전쟁 기간 내내 필리핀 저항 세력의 단합을 어렵게 했고, 결국 미국의 ‘분할 통치’ 전략에 일시적으로 힘을 실어주는 결과로 이어졌다.
주요 전투와 전술
전쟁초기에는 양측 모두 정규전 형태로 충돌했다. 미국군은 우수한 화력과 해군력을 앞세워 필리핀 주요 도시와 항구를 빠르게 장악했다. 그러나 필리핀군이 산악과 밀림 지대에서 게릴라전을 벌이면서, 미국군은 낯선 환경에 적지 않은 어려움을 겪었다. 전장이 확산됨에 따라 필리핀 저항 세력은 지역적 특색에 맞춰 유연하게 전술을 구사했고, 미국군은 보급과 인프라를 안정적으로 확보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철도·도로를 건설했다.
1906년 3월 7일. 다조산 전투 이후 버드 다조 학살 게릴라 전략과 장기전
필리핀 측은 능동적인 게릴라전을 펼쳤다. 지형을 잘 아는 현지인들이 분산된 부대로 움직이며 기습 공격을 시도했다. 낮에는 평범한 주민인 척 위장하고, 밤에는 무장병력으로 변신해 미군 보급로와 기지, 순찰대를 노렸다. 이러한 전술은 미국군에 끊임없는 스트레스를 주어, 미군이 거점 확보에 집중하도록 유도했다. 필리핀군은 장기전을 통해 상대의 전력을 소모시키려 했고, 이것이 실제로 미군 병력 운용에 부담을 줬다.
1899년 마닐라 산타 메사에서 부상당한 미군 - 워싱턴 보병대 부상병 미군의 신무기와 전투방식
미국군은 게틀링건(Gatling Gun) 등 비교적 최신 무기를 사용하며 화력 면에서 우위를 점했다. 또한 기관단총 및 연발식 소총을 도입해, 무장 면에서 스페인군이나 필리핀군보다 진일보한 전력을 과시했다. 해군 역시 장갑 함정을 대거 운용해, 섬 지역과 해안 지역 봉쇄에 유리한 조건을 만들었다. 이런 압도적 화력에 대응하기 위해 필리핀군은 진지 구축과 게릴라전을 병행하며, 도심 지역을 떠나 산악과 밀림 지대로 이탈해 저항했다. 그러나 빈약한 보급과 무기 부족은 필리핀 게릴라전이 가진 한계였다.
발랑이가(Balangiga)에서의 충돌
1901년 9월 사마르섬 발랑이가에서 필리핀 저항 세력이 미군 주둔부대를 기습해 큰 타격을 입혔다. 이는 미군 역사상 상당히 충격적인 피해로 기록된다. 필리핀 저항군은 발랑이가 교회 종소리를 공격 신호로 활용해 미군을 급습했고, 한때 주둔지 대부분을 장악했다. 이후 미군 측은 ‘사마르섬을 지옥으로 만들겠다’며 보복 작전에 나섰고, 잔혹한 민간인 학살 사례도 보고되었다. 발랑이가 사건은 필리핀-미국 전쟁의 대표적인 교전 중 하나로, 전쟁의 비인도적 측면을 여실히 보여주는 사건이었다.
학살 당한 필리핀 저항군 전쟁이 필리핀 사회에 미친 영향
전쟁은 필리핀인의 삶과 사회 구조를 근본적으로 뒤흔들었다. 게릴라전과 미국의 대대적인 군사작전으로 많은 농경지가 황폐해졌고, 인구도 급격히 감소했다. 민족의식은 더욱 강해졌으나, 지역 간·계층 간 분열도 동시에 발생했다. 전후 식민 행정이 본격화되면서 미국식 교육 제도, 영어 사용 확대, 경제 구조 변화가 뒤따랐다.
민족 분열과 단결
전쟁 기간 중 일부 지역 지도자들이 미국과 협력하며 영향력을 키우자, 필리핀 사회는 내부적으로 분열을 경험했다. 동시에 외세 지배에 대한 공동의 반발심이 점차 커져, 독립운동을 이어갈 강한 민족의식이 형성되었다. 결국 전쟁 이후에도 다양한 사회 운동가와 지식인들이 독립과 주권 회복을 위해 조직적으로 활동했고, 이는 훗날 미국이 필리핀 자치와 독립을 부분적으로 인정하는 계기가 된다.
경제 구조의 변화
미국은 전쟁 종전 후 필리핀 내 철도와 도로를 대대적으로 건설하고, 농업 및 광업 개발에 투자를 확대했다. 그러나 이런 ‘근대화’ 정책은 미국 자본과 현지 협력 세력에게 유리하게 돌아갔고, 대부분의 농민이나 민중은 토지를 잃거나 저임금 노동에 내몰렸다. 미국식 기업 경영과 대규모 농장 제도가 도입되면서, 종래 스페인 지배 시기와는 또 다른 형태의 경제 격차가 심화되었다. 필리핀 국민 다수는 여전히 빈곤한 삶을 벗어나기 어려웠다.
문화 정체성 수호 운동
미국은 영어 교육 보급과 미국식 학교 설립을 통해 필리핀 사회 전반에 영향을 미쳤다. 교육 기회를 얻은 일부 필리핀인들은 새로운 지식을 습득해 행정, 법조 분야에서 활약했지만, 동시에 전통문화가 위축되거나 잊힐 위험도 생겨났다. 이에 맞서 현지 민족주의자들은 스페인 지배 이전의 필리핀 역사와 언어, 문화를 재조명했다. ‘필리핀어 부흥 운동’이 이어지며, 독자적 문화 정체성과 자부심을 지키려는 노력이 점차 확대되었다.
미국 내 여론과 반전 움직임
미국 내에서는 필리핀 지배 정책을 둘러싸고 치열한 논쟁이 일었다. 스페인 제국주의에 맞서 독립을 지원했다던 미국이, 곧바로 또 다른 제국주의 세력으로 변모했다는 비판이 커졌다. 의회에서는 반전과 자치 인정 움직임이 일었고, 언론과 작가들도 이에 동조하거나 반대 입장을 밝히며 여론이 갈렸다.
의회 내 반전파의 등장
미국 의회에는 윌리엄 제닝스 브라이언을 비롯한 반전 성향 정치인이 등장해 “미국 헌법의 가치에 반하는 식민지 경영”을 강하게 비판했다. 일부 상원의원과 하원의원들은 전쟁 비용과 사상자 증가, 그리고 필리핀인들을 억압한다는 도덕적 문제를 지적하며 조기 종전을 요구했다. 이는 대통령과 행정부의 제국주의 정책에 대한 공식적인 저항이었고, 미국 역사에서 제국주의와 자국 이익을 둘러싼 치열한 가치 충돌을 보여주는 사례였다.
언론의 영향력과 공공 여론
당시 황색 언론(Yellow Journalism)으로 불리는 sensationalism 매체들은 전쟁을 과도하게 미화하거나, 반대로 미군의 폭력을 고발하는 기사로 독자의 감정을 자극했다. 뉴욕 저널, 뉴욕 월드 같은 신문은 필리핀-미국 전쟁 관련 소식을 대서특필하며, 전쟁에 대한 대중의 열기를 더욱 높였다. 전사자 수, 민간인 피해, 필리핀 저항군의 용맹 등을 자극적으로 보도하는 언론들은 반전 운동가들과 함께 미군의 잔혹행위를 부각했다. 한편 친정부 성향의 신문들은 “문명화 사명”을 강조해 전쟁을 정당화하려 했다.
마크 트웨인의 비판
유명 작가 마크 트웨인은 이 전쟁을 두고 미국의 제국주의를 신랄하게 풍자했다. 그는 당대 에세이와 인터뷰에서 “미국이 필리핀을 광활한 식민지로 만들려 한다면, 우리가 내세운 자유와 민주주의의 가치는 어디에 있나?”라는 물음을 던졌다. 그는 필리핀인에게 자유와 평등을 보장하지 않는 미국의 행태에 모순이 있다고 주장했다. 트웨인의 발언은 당시 지식인 사회에 큰 반향을 일으켰고, 공화정의 이념과 제국주의 간 충돌을 다시금 의식하게 했다.
전쟁의 종결과 유산
1902년 미국은 필리핀 주요 지도자들의 항복을 받아내며 전쟁의 종식을 공식 선포했다. 하지만 산발적 저항은 이어졌고, 미국은 필리핀에서 식민 행정을 계속했다. 이후 점차 자치가 확대되고, 1935년 필리핀 자치령이 수립되었으며, 1946년 드디어 독립을 이루었다. 그러나 필리핀-미국 전쟁의 상흔은 다양한 형태로 현대까지 이어지며, 양국 관계와 필리핀 내부 정세에 영향을 남겼다.
1902년 공식 종전과 후속 조약
1902년 7월, 미국 의회는 필리핀에 대한 민정법을 통과시키며 군정 통치를 민정으로 전환했다. 에밀리오 아기날도를 비롯한 저항 지도자들은 이미 체포되거나 항복했으며, 고위급 지도부가 와해된 상황에서 필리핀 국민 대다수는 식민 통치를 수용하거나 조심스럽게 순응할 수밖에 없었다. 미국은 필리핀 사회 곳곳에 관리를 파견했고, 미국의 사법·교육 제도를 도입해 식민 행정을 굳혔다.
필리핀 자치와 독립의 길
미국은 필리핀을 완전히 병합하기보다는 점진적 자치 제도를 도입했다. 1934년 타이딩스-맥더피법(Tydings–McDuffie Act)으로 10년 후 독립을 약속했고, 1935년 필리핀 자치정부가 출범했다. 제2차 세계대전 중 일본의 침략으로 잠시 차질이 생겼지만, 종전 후 미국은 약속을 이행해 1946년 필리핀은 드디어 완전한 독립국이 되었다. 이 과정에서 전쟁 당시의 피해와 상흔은 교육·정치·경제 곳곳에 반영되었고, 필리핀 민족주의와 미국 문화가 공존하는 복합적 사회가 형성되었다.
오늘날의 평가와 교훈
필리핀-미국 전쟁은 현대 필리핀사와 미국사에서 제국주의와 민족주의의 충돌을 상징하는 사례로 꼽히고 있다. 필리핀 측은 이 전쟁을 식민 지배에 맞선 민족 해방 투쟁으로, 미국 측은 제국 확장과 ‘문명화 사명’을 동시에 상징하는 역사로 기록한다. 전쟁의 비극적 교훈은 강대국과 약소국의 불균등한 권력 관계에 대한 비판이 계속되어야 함을 보여준다. 오늘날에도 양국은 밀접한 군사·경제 관계를 맺고 있지만, 과거 식민 통치의 상처와 분쟁의 기억은 완전히 지워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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